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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Aug 24. 2022

길을 곧게 하라

잠언 4:14-26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아들아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입술에서 멀리 하라 

(잠언 4:14-26절)





어제 아버지 생신을 기념해서 가족들과 모임을 했습니다. 큰아버지를 모시고 오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내비게이션 주소를 잘못 입력해서 5분이면  거리를 25분이나 걸려 도착했습니다. 물론 모든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점심 식사를 했지만, 운전만큼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갔으니까  거지 아닙니다. 제대로 가야 잘한 것입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천국행 열차를  것으로 잘했다 칭찬받지 못합니다. 중간에 잘못 환승하거나, 중간 정류장에서 멈춰 서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성공적이지 못한 구원입니다. 시편과 잠언에는 믿는 자들의 ‘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목적지만큼 중요한 것이 그들이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을 굽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시선 돌리기

첫째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 눈은 바로 보며  눈꺼풀은  앞을 곧게 살펴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25-26) 가야 할 길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위를 걸을 ,  위를 걸어가는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보았을 ,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다 말씀으로 그를 꾸짖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해  위를 걸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보는 , 보다 정확히 말해, 자신이 바라보던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는  사용하는 가장 좋은 무기는 바로  ‘시선 돌리기입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이 가진 소유물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대가 추구하는 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유목민의 삶과는 전혀 반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가지기 , 소유물도 적었고, 농사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집도 없었습니다. 정말 대책 없는 삶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유목민 시대보다, 왕정시대가  클지 모르지만, 저는 설교를 준비할 , 전자에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그들이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은 나라를 얻고 부강해졌을  보다  크고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유물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관리할 것이 늘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관리할 것이  늘어난다는 것은 마음을 써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마음을 써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귀의 ‘시선 돌리기’ 시대입니다. 초대 교회처럼 강한 육신적 핍박을 통해 교회 가는 길을 막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고통받는 일이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마음을 서서히 뺏을 만한 일들을 만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잘하는 거짓말은 이겁니다. ‘바빠서 말씀을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예배를 드릴  없어요.’ 베드로가 물에 빠질 , 베드로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강풍이었고, 이로 인해 생긴 물살의 소리는 그를 잡아먹을 만큼 컸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쳐다보고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예수님은 거센 바람과 물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의심하였느냐.’( 14:31) 수십  전만 해도 교회가 행사를 하고 수련회를 하면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아이들 붙잡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수십 명씩 모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의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아이들이 시간이 있는 것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은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하늘에  있는 별도 자신의 이름을 정해 소유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소유하는 것은 그만큼의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비어있어 받는 즉시 그것으로 채울  있는 준비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득  있을 , 우리는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 넣을 자리가 없는데,  빼야 할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부  빼야 합니다. 천국의 값은 온전한 우리의 마음의 값입니다. 반쪽짜리 마음으로 얻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손을 잡고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갔지만,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시선 돌리기에 현혹되어 믿음이 적은 자라는 꾸지람을 받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어쨌든 예수님 손을 잡은 사람이 아니라, 멋지게 예수님의 손을 잡은 사람이 됩시다.


악인의 

우리의 길을 굽게 만드는  번째는 악인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신분은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악한 길을 걸어갈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회개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죄를 날마다 돌아보며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께 고백드릴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곧은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아파하는 것은 죄책감과는 다릅니다.

죄책감은 죄에 대한  인지는 있으나,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좌절하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머무르는 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마치 율법이 우리가 죄인인 것을 가르치고, 양심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알려주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완성이 아닌 것처럼, 죄책감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바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은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죄가 성령의 일을 가로막는다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어둠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을 통해 성령은 일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악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위를 닮아 죄를 짓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내려놓지 않고 이것을 사랑하며 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말씀이 기쁘지 않고, 삶에 의욕이 없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고 율법이 귀찮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사랑을 실천할  없고, 믿음이 짐처럼 느껴집니다. 성령이 소멸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되면 죄가 아프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18-19) 걸려 넘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일어서면 의인입니다.  가운데 있으면  넘어졌는지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에 있으면 무엇 때문에 넘어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율법을 인지하고 이를 힘써 지킴으로 죄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돌이킬  있다면,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의 깊이를 체험하는 귀한 도구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죄를 저지른 사람과 신약에서 가장  죄를 저지른 사람은 각각 다윗과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죄의 기준을 넘어도 한참 넘은 죄를 지었고,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가장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죄를 돌이켜 그것을 삶의 전환점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다시는 동일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사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제자들의 수고를 넘어서는 수고를 했습니다.

죄를 아파하고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입니다. 이사야서 26 7절은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평탄한 길이 넘어지지 않는 길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니 넘어졌다고 해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서지 맙시다. 평탄한 길이 반드시 지름길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돌아가는 길처럼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하나님께서 옳다 말씀하신다면, 바보처럼 순종하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제 길을   잘못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주택 입구처럼 보여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돌아가게 되었는데, 나중에 큰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길을 들어가 보니 주택  쪽에 작은  하나가 굴다리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가는 동안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종착지에 도착해보면,  길이 지름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판단, 세상의 기준으로 길을 판단하지 말고, 의인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주님을 믿고 미련하게 걸어가는 저와 성도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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