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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Aug 30. 2022

복 된 Accident

두려운 삶 속 ‘accident’를 영적 발판으로



영어에 ‘acciden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고, 우연을 뜻하는  단어는 주로 힘들거나 위험한 예측 불가능한 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삶에서 최소화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어린 자녀를 키우면 많은 부분에서 일어날 사고들을 예측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칼이나 유리컵을 만지지 않도록 주방에 따로 문을 설치하고, 실수로 기저귀를 채우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여 침대 매트리스에 방수 매트를 씌우기도 합니다. 물론 주방에 문이 따로 없어도 아기가 조심성이 많으면, 혹은 잠들 , 기저귀 채우는 일을 잊지 않으면 우리가 상상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그대로 예측할  없는 일입니다. 조금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아이의 안전을 위해 모든 위험 상황을 예측하여 대비한다 할지라도, 생각지 못한 상황과 사고는 언제나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일에 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많은 재산을 저축하려 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어느 때보다 공을 들입니다.

종종 우리는 믿음을 너무 강조해서 이런 준비성 철저한 삶을 마치 믿음이 없는 것인  취급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의 계획은 죄가 아니라, 지혜에 속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길을 인도하는 이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  속에 일어나는 예측할  없는 모든 일을 주관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고를 통제하려는 노력을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러 올라갈 때, 하나님께 드릴 번제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아들이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번제물의 의미는 아들 이삭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이르러 제단 나무에 이삭을 묶고 칼로 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확인하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주위를 둘러보니 수풀에 한 숫양이 그 뿔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에 번제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진짜 번제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숫양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들을 쳐 죽이려 할 때 ‘뿅’ 하고 나타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눈을 가려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준비하는 분이라는 사실과 둘째는 눈앞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가리면 우리는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했을  그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고 가정  불화가 생겨나자, 아브라함은 하갈과 함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에게 떡과   가죽 부대를 주고 그녀와 아들을 함께 내쫓아 버립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을 배경으로 성경에 등장한 믿음의 조상들은 광야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말씀을 의지하여 떠나 광야 생활을 했고, 야곱도 자신의 집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며 광야 생활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도 출애굽  40년이란 기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만만하게 보는데, 사실 광야로 나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과 음식이 없는 사막이고, 언제든 노략과 살육의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갈을 통해  사막의 비참함이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방황하다 가죽 부대의 물이 모두 떨어지자, 자신의 아들을 두고 얼마가 떨어져 하나님께 외칩니다.

 “ 아들이 죽는 모습을 곁에서는 지켜볼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갈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손으로 붙들라 그가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21:17-18)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하갈과 관계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상 하갈과  아들을 위해 해줄  있는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광야에서 떡과 물이 모두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죽는다 할지라도 죽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은 여전히 닿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무력하고 아들의 고통에 슬퍼하는  어미의 음성을 듣고 위로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갈이 당하는 일은 아브라함에게는   없는 , 하갈에게는 사고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없는 일이 없고, 사고 같은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성령을 보낸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27) 세상에서  손에 미치지 못하는 , 예측할  없는 일들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기도의 내용이 목표 지향적이고 자기 주도적입니다. 겉으로  보면 신령해 보이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쉽게 식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기도는 미래를 준비하고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에게 우리의 미래를 묻고  속에서 안정감을 찾고 싶다면, 교회와 점집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예수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는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6-7).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천사도, 아들도 모르는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열등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미래 일을 위해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안한 삶은 내일을 예측하고 준비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아는 , 가지는 것으로 평안의 자리를  주지 말고 말씀으로  자리를 채워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위로한  그녀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하갈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밝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주변에 있던 샘물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그렇다면 샘물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번제물인 숫양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말씀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발견한 숫양도, 하갈이 발견한 샘물도 이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으면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멸시키는 일은 수십만 애굽 군인들에게는 밥을 먹는  만큼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닿을  있는 거리에 있다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 그들 모두에게 홍해바다는 눈이 가려진 자와 눈을  자를 명확히 나누는 기준 점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복은 이처럼 영적인 눈을 뜨는 일입니다.

나한테 가장 필요 없고 피해야 하는 상황인  알았는데,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훈련의 시간이 되었구나.’, ‘매번 실패하고 죄를 지어 좌절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붙들어 주시는 구나.’, ‘내가 우리 , 우리 아들에게 많이 신경  주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으로 그들을 채워 주시는구나.’ 눈을 떠서 앞에 있는 산을 보면 넘어야  고난이지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천지와 눈앞에 있는 산을 지으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평안함을 찾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accident’ 영적인 눈을 뜨는 발판으로 삼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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