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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Nov 02. 2022

무리들과 제자

하나님을 바라봐야할때

무리들과 제자 ( 17: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진정한 왕이 되신 것 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화려한 예수님의 입성은 고난을 알리는 시작 점이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쌌던 수많은 군중은 후에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원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자리가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 마저 떠나버린 외로운 죽음. 바로 그 자리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알리는 시작 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겉으로 판단받을 수 없습니다. 누가 볼 때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상은 고난의 길목에 접어든 것일 수도 있고, 또 누가 볼 때는 가장 하찮고 비참해 보이지만, 실상은 광명의 길목에 접어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민숙 집사님께서 지난 주 금요일에 위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 어려운 과정 겪느라 많은 고생했고, 육신적으로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지금 하찮고 힘들어보이는 이 순간이 도리어 새로운 삶을 향한 시작점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보람 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병자를 낫게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주님의 사역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할 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 그리고 말하는 방식,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넘겨져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찾아와 인사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묻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열 명의 나병환자는 모두 자신의 병이 낫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중 아홉은 병만 나으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나은 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예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중 이방인이었던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단순히 육신의 일로 바라보지 않고 영적인 눈을 들어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했고,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세상에 눈이 고정되면 기적을 보고도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떤 선지자도 행하지 못한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따랐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부활했을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위에 해가 될까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모두가 보는 기적을 그들은 육신의 안목과 정욕으로 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필요해서 찾아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해결하고자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저는 중학교 미술부 선배들을 따라 교회를 처음 갔습니다. 물론 종교 시간을 통해 말씀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예배를 모두 마치고 청년들과 농구를 같이 하고 싶어서 간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그들 중 저만 교회에 다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수년 전에 우연히 만난 선배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이야기가 나오자 놀라면서 저에게 그러더군요. "너 아직도 교회를 다니니?" 선배들에게 교회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연애하고, 운동하는 곳. 저는 농구가 시작이었지만,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했고, 내 삶을 모두 주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날은 날을 새도록 물고기 한마리 잡지 못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간절했던 물고기를 배가 가라앉을 만큼 건졌을 때, 오히려 베드로는 그물을 던져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교회를 통해, 혹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바람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구약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목이 곧은 백성이라 지칭하는 장면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목이 곧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stiffed-neck, 목이 움직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조금더 자세히 말하면, 자신이 보는 곳에서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랏 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불만이 생겨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뱀들을 보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원망함이 잘못된 줄 알고 모세에게 불뱀들이 떠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하나님께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면 사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많아 놋뱀을 혹시 보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까 싶어 그 놋뱀을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고개만 들면, 조금만 돌리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이 곧은 자들은 이 놋뱀을 쳐다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팔을 접은 상태로 오랫동안 깁스를 하면, 깁스를 풀어도 팔이 안펴지는 것 처럼, 오랫동안 영성을 가다듬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때, 목을 돌리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여러번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조금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들 말고 예수님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이를 미리 기념한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환영받으며 입성하는 예수님. 병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의 예수님.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조차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님의 형상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본질을 바라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환영받는 자리에는 함께 했으나, 고난받는 자리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아홉명의 나병환자가 나음을 받고 예수님을 떠난 것 처럼. 무리와 제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곁에 서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그 곁에 딱 붙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뭐라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혹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복이 있구나, 그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칭찬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베드로가 뭔가 깨달은 것 같지만, 사실 그 다음 장면을 통해 베드로가 전혀 그 말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항변하여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베드로가 그 예수님을 혼내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올바른 고백으로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곧바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참 다양하지만, 오늘은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으로 주님 곁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 곁에 서 있는 은혜도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할 수 있고, 그래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 목이 곧은 백성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을, 행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곁에 머무르길 원하십니다. 풍요로운 날이나, 가난한 날이나. 기쁜 날이나, 슬픈 날이나. 행복한 날이나, 힘들 날이나 그 곁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필요할 때 몰려드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니까 따르는 제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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