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e Park Nov 02. 2022

둘째 사람 (고전 15:45-49)

둘째 사람으로 살아가기

둘째 사람 (고전 15:45-4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다음 날이었습니다. 날이나 절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난 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날이었고, 그 주일 예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일 예배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해 오늘 본문 말씀처럼 바울은 부활의 의미를 적어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이생이 마지막입니다. 이 생이 마지막이라면, 하늘의 복을 바라며 고통을 견디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삶이 됩니다. 핼러윈 기간이라고 사람들은 연휴를 즐기고 휴가를 갑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유를 내려놓고 예배를 드리러 온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기준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은 것이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은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통해 예상해 볼 수 있는데, 그 복은 우리가 이생에서 받는 복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생이 아닌, 내 생의 복입니다. 이생에선 주리지만, 내생에선 채워지고, 이생에선 눈물 흘리지만, 내생에선 위로를 받고, 이생에선 고난을 당하지만, 내생에선 천국의 주인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바라는 것이 단지 이생의 복뿐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른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나중을 위해 힘씁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적금하고, 건강을 관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말합니다. "다음에 또 보자." 우리는 눈을 감고 눈을 뜨면서 자신도 모르게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한 확신이 오늘 수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가지고 있는 시간, 돈, 건강을 모두 자신을 위해 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일이 되면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아끼는 것은, 그리고 참고 견디는 것은 그 행위로써 고통스럽지만, 우리에게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쉴 수 있는 날, 누릴 수 있는 날, 웃을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면서. 이것과 마찬가지로,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예배는 그것을 다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우리가 하늘의 상급을 쌓는 데 더 큰 열정과 노력을 다할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해 줍니다. 믿음이 있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고, 말씀을 알고 있어도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우리를 세상 속에 가두고 이생의 복을 추구하며 살도록 강요합니다. 가진 것을 부족하게 여기며 더 가지고 싶은 탐심이 찾아오고, 허락되지 않은 이성을 향해 음욕의 마음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향해 날카로운 판단과 미움의 마음이 타오릅니다. 세상은 그러한 모든 마음이 인간으로서 품을 수 있는 타당한 마음으로 볼 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성령의 일과 반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과 우리의 육신이 서로 반대로 움직인 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바울은 자신을 매일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바울은 자신을 죽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삶, 곧 부활의 삶을 사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말씀을 듣고, 말씀을 알지만, 바울처럼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자들의 삶은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아는 자들이 육신 가운데 범죄 하는 것을 그대로 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지금 열거된 수많은 죄들이 말씀을 모르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아는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죄들입니다. 죄는 아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삶은 말씀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큰 죄에 빠져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는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전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을 통해 끊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의 소망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은 본체 하나님과 동일하시므로, 태어난 날도 없고 죽는 날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에게 매우 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창조 세계에 묶여 사는 인간에게 자신들의 마지막 시간, 곧 죽음을 이겨내는 예수님을 보는 것은 이생의 시선을 벗어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첫 아담은 육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육신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흙으로 나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나왔으므로, 하늘로 돌아가게 됩니다. 4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29). 바울은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며 예수님의 이름 대신 아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언어유희적인 측면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아담의 원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부름 받은 첫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생육하고 번성하며 영원한 기쁨을 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 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의지하여 결국 자신뿐 아니라, 그를 통해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을 계승시켰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둘째 아담은 하나님께서 아담이라는 사람을 통해 계획했던 일을 자신의 목적대로 이루는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나온 사람, 곧 죄를 이어받은 사람으로서는 죄가 없는 깨끗한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줄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이 된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말하며 자신의 삶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잡아 넘기기 위해 다메섹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사도로서의 직책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첫째 바울(사울)은 육신의 사람이었지만, 둘째 바울은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신분, 외모, 능력,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보는 시선까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복음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전천후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울을 통해 계획했던 삶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첫째 바울의 삶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모든 것이 바뀝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외모와 능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곤충에 관심을 가질 때 가장 놀라는 것은 나비가 한 때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입니다. 둘은 어떠한 유사성도 찾아볼 수 없지만, 나비 중에서 애벌레라는 과거를 가지지 않은 나비는 없습니다. 인간의 부활과 애벌레의 변태의 차이점은 변태를 거친 애벌레는 외형의 완전한 변화가 있지만, 부활을 거친 인간은 내면의 완전한 변화가 있습니다. 외형이 바뀌지 않은 바울을 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겁을 먹고 손사래 쳤습니다. 물론 바나바의 설득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그들을 설득한 것은 속 사람이 변화된 바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 벌레의 목적은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에 벌레는 번데기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나비가 되면 그 나비는 더 이상에 벌레로 불리지 않습니다. 씨앗의 목적은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반드시 땅 속에서 죽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는 더 이상 씨앗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저 이정민의 목적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정민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둘째 이정민이 되면 그 둘째 이정민은 더 이상 첫째 이정민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며 둘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고난 속에서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나는 이제 첫 사람이 아니라, 둘째 사람이다. 더 이상 육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이다.’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에 반응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