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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Nov 02. 2022

무엇에 반응하는가

거룩한 삶을 향하여 죄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무엇에 반응하는가 ( 6:8-14)


최근에 뉴스에 한 유명인이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해당 소식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퍼져있는 마약 유통망이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약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의 최대치에 약 1,000배 정도의 호르몬을 발산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 번 경험하면 그 기분을 잊지 못해 다시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 간절해서, 법도, 사랑하는 가족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마약이 주는 쾌락만을 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인이 눈앞에 보이는 마약을 보고 반응이 없는 반면, 중독자는 눈앞에 없어도 마약 생각 말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마약에 대해 죽은 사람이고, 중독자는 마약에 대해 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죄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에 대해 죽은 것은 죄를 짓는 것에 무뎌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 중심 사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는 자신의 죄에 대해 고민이 매우 깊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죄를 자주 고백했는지, 고해성사를 듣던 신부가 도망을 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마틴 루터가 로마서를 통해 죄에 대해 죽은 것을 깨닫고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의 일을 사모하여 선한 일을 추구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일을 행하려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사로잡는 죄의 법에 묶이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되어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몸을 사용해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호주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련회 때, 강사님들을 앞에 두고 학생들이 무작위 질문을 담아 사회자가 읽으면 강사님들이 답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익명이라는 점을 이용해 다양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술 마셔도 되나요?’,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해도 되나요?’ 같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한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나요? 그럼 하세요.” 학생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되는지, 아닌지, 곧 죄를 중심으로 던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의 대답은 그 일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 아닌지, 곧 의를 중심으로 말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 살아 있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를 율법에 가둡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마치 과거 마틴 루터처럼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중심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산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비록 죄가 우리의 생각에 훼방을 놓아도, 죄에 대해선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난 자 같이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은 던져버리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전의 주인은 내 몸을 죄에 종노릇하며 사망의 열매를 맺는 일을 시켰지만, 우리의 새 주인은 내 동일한 몸을 가지고 의로운 일을 행하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일을 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 우리의 육신이 죄를 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은 의를 행하여 거룩해 지기에 역시 부족함이 없습니다. 바울은 한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분과 언변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데 좋은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바울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의 신분은 옥에서 풀려날 뿐 아니라, 로마까지 올라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의 언변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다양한 국적과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데 걸린 시간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음식을 먹어 몸을 회복하는 며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을 때 바뀐 것은 그의 이름,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진 것을 그대로, 그를 부른 즉시 복음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순간은 며칠 뒤, 혹은 몇 년 뒤 내가 좋은 건강이나, 재정적 안정을 얻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을 주저하고 마음의 법이 아닌 육신의 법을 따라 살게 되면, 우리는 다시 죄에 대해 반응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거룩함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함과 거리가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시편 26편에서 다윗은 기도합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1-2)

이 시편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다윗의 삶이 하나님께 시험받아도 흠이 없을 만큼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없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그들의 삶에서 거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을 아는데, 자신의 입으로 복음을 말하자니 자신의 삶이 영적으로 볼품이 없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가정에서 보인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도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도 압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가식처럼 보이고 능력이 없을지를. 하루라도 빨리 거룩함을 향해 나가십시오. 더 이상 죄에 반응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께 산 자로 반응하며 살아가십시오. 숙제를 대충 한 학생은 검사 시간을 걱정하지만, 숙제를 완벽히 한 학생은 검사가 대충 이루어질까 걱정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시작도 다윗처럼 자신감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완전함에 행하였으니, 저를 살피고 시험하사 나를 판단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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