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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Oct 17. 2022

섬김과 위로

믿는자들의 섬김, 믿는자들의 위로

섬김과 위로 (눅 22:24-31)

고난을 당하기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을 먹는 시간을 가집니다.이제 그 성찬이 끝나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실 만큼 그 시간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큰지에 대해 다투기 시작합니다.마지막 자리인 만큼, 제자들도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예수님께서 떠나기 전, 자신들이 이룬 일들을 이야기하 누가 더 큰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서로 다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큰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가 되면, 평소에 사이가 좋던 자식들이 서로 더 많은 재산을 가지기 위해 다툰다고 합니다.아무리 우애가 좋아 보여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효자, 효녀였다 하더라도, 정작 마지막 자리에서는 자신의 중심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바라는 것은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는 순간까지 서로 누가 더 인정받고 좋은 것을 받을지에 관심이 팔려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적극적으로 반응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5-27절 읽기) 2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세상에서는 왕이 크고 집권자들이 힘이 있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젊은 자와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왕의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를 찾아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습니다.힘이 있는 자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구하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로 약한 자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찬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먹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있습니다.예수님을 통해 배워야 할 사랑의 첫째 자세는 바로 이러한 섬김의 자세입니다.


요즘 한국은 저출산 문제 뿐 아니라, 젊은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 점점 사회 노령화가 가속될 것이라 합니다.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저는 우리 사회에 섬김이 사라지는 현상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둘이 만나 한 몸이 된다는 아름다운 말로 표현합니다.서로 다른 부위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교회를 비유할 때도 사용합니다. 오른 손을 다쳐서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왼손이 오른 손보고 쓸모 없다 말하지 않습니다.

 부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서로가 자신이 아닌, 서로를 주장해주고 감싸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몸이 하는 일입니다.그래서 근본적으로 결혼은 섬김의 태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라는 동안, 자식은 부모의 희생을 먹고 자랍니다.애기 때는 잠도 못자게 하고, 아이일 때는 식사 메뉴를 맞춰주느라 원하는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조금 더 크면 양육에 드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원하는 것을 살 수도 없습니다. 결혼이 축복인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가정을 꾸려 봐야 내가 진심으로 섬김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난 얼마나 용서할 수 있는가, 난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왕은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찾지만, 섬기는 사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습니다.결혼을 하는 이유가 섬김이 아닌,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 곧 자신의 외로움, 재정적 도움, 사회적 위치, 혹은 주변 시선에 대한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자신의 필요에 맞춰져 있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한 몸이 되는 부부로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심으로 섬김을 다짐하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섬김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들 모두 나름의 섬김이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 심지어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발적인 섬김이라 하더라도,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섬김은 믿음으로 행하는 섬김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일이 자신의 기대에 충족한 보상으로 돌아오길 기대합니다.반드시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칭찬과 인정의 말, 혹은 누군가를 도워주었다면, 다음 번에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보답으로 받게 될 도움처럼 마음 한 구석에 기대라는 방을 만들어 놓습니다.

 호주에서 한 외국인 친구가 저와 아내, 그리고 첫째 아들에게 만날 때마다 예쁜 선물을 하나씩 준 적이 있습니다.저는 뭔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에 빚지는 기분이 들어 사실 다음에 만나는 것이 부담될 때도 있었습니다.그러던 어느날 그 친구가 선물을 주면서 저에게 갑자기 정말 고맙다는 생각지도 못한 인사를 했습니다.내가 할 말을 왜 이 친구가 하나. 자신이 우리에게 선물을 할 수 있는 기쁨을 허락해 줘서 너무 고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진정한 선물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받으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는 섬김을 일종의 거래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내가 먼저 낸 비용을 나중에 돌려받는 것이죠.그래서 섬김이 피곤합니다.일일히 내가 해준 것을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결혼식 가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하는 일이 무엇입니까?그 친구는 내 결혼식에 왔는가, 왔으면 축의금을 얼마를 냈는가?

 제자들이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겪은 수 많은 고생이 그들에게 어떤 보상을 주었을까요?아무 것도 없습니다.오히려 그들은 고난을 받았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바친 대가가 죽음이라면, 그것만큼 억울하고 불공정한 거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6) 우리가 예수님께 배운 섬김은 주고 받는 일종의 거래가 아닙니다.얻는 것이 없어도, 내 것을 잃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해야 할 사랑의 실천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누가 더 크냐 다투었던 제자들은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공을 인정하고 격려합니다. (28-30).우리가 예수님으로 부터 배워야 할 사랑의 두번째 자세는 바로 이러한 위로입니다. 1991년 3월 대구에서 다섯 명의 국민학교 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아직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2011년, '아이들'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인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중간 실종된 학생들의 아버지중 한 명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이 영화는 그 아버지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를 궁금해 하도록 관객들을 유도합니다. 끊임없이 취조하고, 화장실과 벽을 부수는 과정 속에서도 그 아버지는 방에서 묵묵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자 이웃 중 한명이 아버지를 찾아와 말합니다.'당신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속상하지도 않소?' 아버지가 대답합니다.'난 그게 속상한게 아니라, 내 자식이 살아있을 거라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게 속상하다네.' 전 이 영화에서 이 대사를 최고의 장면으로 뽑습니다. 그 영화를 보는 저도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몰두하였을 뿐, 희생자 가족의 마음이 어떠할 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과 허물을 찾으려 노력하면,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그것이 제 아무리 정의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족함을 아는 것을 넘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31절 읽기) 시몬이라는 단수로 말을 시작하지만, 너희들이라는 복수가 목적어가 됩니다.다시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모두 사탄의 시험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는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자신이 받을 모든 상처와 고통을 넘어, 제자들을 향한 진심어린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공을 해서 왕이 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잘못을 지적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 바로 섬김과 위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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