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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Dec 13. 2022

진짜 같은 가짜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것은 다니엘의 정신을 통해 배우다.



우리의 사랑에는 생각보다 많은 변명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변명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여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데이트 범죄를 보면,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폭행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 보단,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피해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주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범죄에 대한 법의 기준은 그나마 분명해서 그러한 터무니 없는 주장이 옳다고 여겨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애정과 관심에 대한 올바른 기준에 대한 설정은 많은 경우 '개인적 판단'에 맡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에게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는 경제력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그 기준이 자녀가 재정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지만, 각 사례를 통해 좋은 예와 안좋은 예를 보며 주장만 할 뿐, 결국 답을 찾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비단 개인 뿐 아니라, 단체,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1096년부터 약 200년 동안 9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이었습니까? 그들의 시작은 이도교들로부터 자신들의 집, 예루살렘을 되찾고자 하는 갈증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정치적 개입과 불필요한 살생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들은 일주일동안 그 안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죽여 그 시체를 처리하는 십자군까지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도교의 살라만은 오히려 성내 사람들이 자유롭게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십자군의 참상을 우리가 들여다 본다면, 오늘날 그 전쟁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이 때로는 잘못된 행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대학생 때 청년들과 함께 티벳 단기선교를 떠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지역에 큰 불교 사원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에 방문을 했습니다. 거기에 불교 신자들이 걸어가며 옆에 서 있는 불경을 한 방향으로 돌리면서 지나가는데, 우리 일원 중 한 명이 그 불경을 반대로 돌리며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를 담당하셨던 목사님께서 그 자매에게 그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지혜롭게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과 그것을 섬기는 자들에게 적대적일 수록, 하나님께서 더 많은 복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마음을 품는 것이 좋은 믿음의 태도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시대적 특수성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과 멀어지면 고난이, 이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면 평안이 찾아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이끌었던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말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오늘날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법을 만들고 경제적으로 지혜롭게 대처하는 능력입니다. 당연히 오늘날 대통령은 이러한 자질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그런 지도자가 필요 했을까요? 아닙니다.

백성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던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약속한 7일이 지나도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 그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번제를 드린 이유는 백성들이 동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모든 전리품을 불태우지 않고 쓸만한 것들을 가지고 온 것 역시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고자 백성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서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했습니다."(24) 그러나 사울이 왕으로서 해야할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이지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백성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왕은 시드기야 였습니다. 그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바벨론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도록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버텼던 왕이었습니다. 마치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크 대통령 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지도자는 오늘날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시작된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붙여 모든 땅을 갈아엎고 다시 새 땅에서 새 출발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시드기야의 귀에는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승리에 대한 예언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2년이라는 전쟁 동안 바벨론은 수 차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포로가 될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했고, 결국 이스라엘이 함락될 때, 쌓아놨던 분노를 퍼 붓듯 바벨론 군인들은 무참하게 그들을 학살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처참한 장면을 노래한 예레미야 애가가 시드기야의 선택이 낳은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잘 알려줍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흩어집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그들 중 능력있는 자들을 뽑아 궁궐에서 왕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중 한명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으로 다니엘을 바라보면, 그가 느부갓네살을 암살하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업적을 세우지 않는 한 그는 민족의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놀라울정도로 자신의 원수인 느부갓네살의 편에서 충실히 일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왕이 꾼 꿈으로 근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꿈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하인들을 옥에 가둘 만큼 근심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는 후에 왕이 된 벨세셀 왕에게도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 다음왕이 다리오 왕에게는 얼마나 신뢰를 받았는지, 다니엘이 모함받아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 다음날 새벽이 될 때 까지 금식하고 잠도 설쳤습니다.

다니엘은 철저하게 바벨론의 충신이었습니다. 백성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고했던 왕들보다 원수 국가에서 충성을 다하는 다니엘을 우리가 왜 주목합니까? 다니엘에게 진정한 나라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필요한 지도자의 덕목이 구약에서는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또 구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덕목이 오늘날에는 자칫 큰 문제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하는 정신은 바로 다니엘의 정신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예배에 필요한 장소와 섬기는 데 필요한 자본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가 서 있는 국가도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국가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실패하지 않을 때, 우리 앞에 서 있는 아무도 넘을 수 없는 산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던 요셉 앞에 꿈으로 고통받는 에굽 왕은 요셉과 이스라엘이 일어서는 발판이 되었고, 나라를 빼앗긴 포로였던 다니엘 앞에 꿈으로 고통받는 바벨론 왕은 강대국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퍼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이 필요한 것은 믿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말씀안에 거하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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