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e Park Jan 17. 2023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고전9:24-27




엘리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 블레셋에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언약궤를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삼만명이 죽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고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역시 의자에서 떨어지며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는 일은 단순한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승리를 의미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있는 기간은 7개월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언약궤가 머무는 곳마다 이방신상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독종과 환란으로 그 지경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도저히 하나님의 궤를 곁에 둘 수 없어서 결국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죄가 만연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블레셋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에게 다양한 사건과 시험으로 자신이 참 신인것을 드러낸 동시에, 사람의 힘으로 꺾을 수 없는 전능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인 벧세메스 길에 여호와의 궤가 도착했습니다. 백성들이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패배했던 전쟁에서 스스로 자신을 세우시고 직접 이스라엘의 땅으로 돌아온 것은 그들에게 다시 찾은 희망이요, 새로운 출발의 시작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궤 안을 들여다보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궤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혹은 전쟁에서 다시 돌아온 궤 안에 내용물이 훼손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당시 허락된 자가 아니면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벧세메스 사람들이 오만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은 자가 삼만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일로 죽은 자가 그보다 훨씬 많은 오만명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표가 아닙니다. 물론 그 것은 그들이 가진 그 무엇보다 귀중하고 무엇보다 의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약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궤가 돌아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잔치를 벌일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잊고 경건함을 버리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일에 참여할 때, 경건함을 빼면 그 일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궤가 돌아온 그 날, 경건하지 않은 백성들로 인해 블레셋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이스라엘을 덮쳤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입니까? 부족하고 힘들 때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자신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의 달음질을 향방 없는것 같이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정확히 발을 내딛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선수처럼, 바울은 모든 일을 절제하고 자신의 육신을 쳐서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궤를 다시 돌려받은 이스라엘이 중심이 빠진 기쁨으로 도리어 버림을 받은 것처럼, 자신 역시 복음을 전파한 뒤, 잘못된 발걸음으로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중 하나는 바로 믿음 만능주의 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면, 내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모든 일을 이룬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겉으로는 이신칭의와 비슷한 주장처럼 들리지만, 인간의 회개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이므로 매우 이단적 사상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의 출발선을 통과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달음질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상도 없고, 더 나아가 버림받은 자처럼 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지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도록 우둔하여 진 것은, 그들의 꺾임으로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덧붙임을 받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21) 바울은 믿음으로 덧붙임을 받은 가지인 우리에게 원 가지가 믿음이 없음으로 하나님이 아끼지 않고 꺾어버렸으니, 너희도 믿음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꺾어버릴 것이라 경고합니다.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참감람나무에 가지로 덧붙임 받는 것은 경주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점을 바울은 비유를 통해 로마서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회심의 기도를 하는 것은 구원을 넘어서는 목적지를 깨닫고 그 길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분은 목적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선수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선수가 되었어도 목적지를 잃으면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목적지를 잃은 선수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 적지않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적지는 하나님이 아닌,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에 이르러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가장 힘든 순간 하나님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다윗은 왕이 되고 나라가 태평성대 할 때, 남편이 있는 밧세바를 취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히스기야는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을 기억해 달라며 하나님께 통곡으로 기도하고 15년의 삶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은 기간동안 블레셋 사자에게 나라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바랬던 가나안,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는 태평성대, 그리고 기도로 연장된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받는 자가 자신의 목적지를 잃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땅이 되었고, 밧세바를 취한 다윗은 그 벌로 자신의 첫째 아들이 죽었고, 히스기야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블레셋 사자에게 보여준 실수는 자신이 보여준 모든 것이 블레셋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예언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예배를 떠날 수 없고 기도가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오히려 굳게 섭니다. 그런데 복을 받고 감사할 일들이 있으면 예배가 소원해지고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달음질하는 선수로서 우리의 목적지를 잘못 정했을 때, 곧 우리가 믿음을 세우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며, 기적같은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를 귀 기울여 들어 보십시오. 못된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보다 잘되는 일,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는 일, 점점 심해지는 빈부 격차로 가난한 자들이 고통받는 일 등 세상에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사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공정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일을 해결 해 주는 해결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믿는 우리도 하나님을 해결사의 자리에 앉혀 놓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구원의 경주에서 우리가 선수로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소망의 경주에 하나님을 선수로 뛰게 만드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경주에 참여한 선수들이 저 하늘에서 받을 복은 없습니다. 병을 낫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의 소망이 병이 낫는 것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의 소망이 가난을 벗어나는 것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의 소망이 꿈을 이루는 것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일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왕은 너희가 한 일을 용서해 줄테니 다음에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할 때가 오면 절을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너희를 던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친구들은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그들이 왕에게 한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건짐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수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수라는 선포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같은 가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