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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Apr 03. 2023

중심의 문제

좋아하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니까요

제가 젊은 시절부터 드린 기도가 있는데, 나이가 26에 결혼을 하게 해 주시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일찍 결혼해 아이를 많이 나아서 복음으로 키우고 싶었고, 둘째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순수하게 사람을 보고 결혼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유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기도한 나이인 26살이 될 때까지 연애 한번 못하다가 그 해 아내를 만났고 약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당시 청년들 사이에서는 이정민 교육전도사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큰 화재였습니다. 더욱이 한국에서 저와 오래 신앙생활을 했던 청년들은 제가 26살에 결혼을 두고 기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결정했으니, 주변 청년들이 제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아내를 만났을 때, 결혼할 대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을 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들과 젊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은 대부분 'How'에서 시작합니다. 영어 'how'라는 단어는 흥미롭게도 상황에 따라 '어떻게'라는 수단, 그리고 '얼마나'라는 수량을 표현하는 의문사로 사용됩니다. How라는 질문, 곧 배우자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배우자와 결혼하면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가볍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결혼의 본질은 되지 못합니다. 결혼에 대한 확신을 외부에서 찾는다면, 이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할 때 평생을 함께 한다는 약속을 하는데, 그 약속의 토대를 이처럼 언제든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는 외부적인 것에 둔다면, 그 결혼은 언젠가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혼을 왜 합니까? 거추장스러운 답변 모두 치우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좋아하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니까요." 만약 배우자가 How라는 질문에 대해 좋은 답변을 가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많이 가지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러나 부부의 관계 속에 가장 본질적인 서로를 향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부부이고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 예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이 그녀에게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며 훈계를 합니다.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예수님께서 여인의 행위에 선지적 관점을 덧입혀 그것을 기념하게 했으므로, 여인의 말이 정답이고 제자들의 말은 잘못된 것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제안도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형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동생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제사의 형태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반은 맞습니다. 분명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있었고, 그가 드린 믿음의 재물은 그가 알든 알지 못하든 하나님의 뜻을 예표하는 제사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창세기 4장 7절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등장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아벨의 제사는 양과 그 기름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아벨이었기 때문에 받은 것이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려서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죄가 있는 가인이었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만약 가인이 아벨과 동일한 형식의 제사를 드렸다고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그들이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겠다고 한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생각이 아니라, 중심에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행위를 보고 그 여인의 중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인의 행위를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께 칭찬받은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키 작은 부자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와서 식사를 할 때, 삭개오는 회개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곱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삭개오처럼, 그리고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한 칭찬을 거둘 것이라 예상하긴 어렵습니다. 이미 그 여인의 중심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러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기쁨이 될까, 하는 질문들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 것, 어떻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은혜의 방편들이 존재합니다. 저희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평일에도 모이고, 새벽에도 모이고, 다양한 헌금 생활과 개인적 훈련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한다 해도 우리 안에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행위는 어떠한 의미도 낳지 못합니다. 값비싼 악기를 가지고 수백 명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지휘자가 없다면, 그 모든 소리는 소음이 되어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연주회더라도 지휘자가 있다면 그들의 침묵조차 의도된 음악으로 들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중심을 드리면,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행위든지, 심지어 아무런 행위 없는 침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은혜의 방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뜻을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놀랍게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향유 옥합의 값은 약 300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약 1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 옥합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약 3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두바이에 가면 1박에 3천만 원 하는 유명 호텔의 스위트룸이 있습니다. 3천만 원 있다고 갈 수 있습니까? 하루 동안 노는데 쓰기 어려운 돈을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단번에 깨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상황에서 당황한 것이 그리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다른 자들에게 넘겨 무엇을 얻을까 했습니다. 그리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길 계획을 합니다. 은 삼십은 300 데나리온에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노예 한 명의 몸 값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 두 사람의 선택을 사업적으로 보자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큰 재산을 잃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적잖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인은 모든 것을 얻었고, 조금 더 얻고자 했던 유다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율법이 중요해 보이던 왕정 시절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을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전쟁 중 선지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제사를 드리며 사무엘이 정한 시간에 오지 않아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다고 하자, 사무엘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야으이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사무엘이 왕이 될 자에게 기름붓기 위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자녀들이 겉으로 볼 때 충분히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기름붓기 위해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한 한 여인을 보며 ‘나도 내가 가진 모든 걸 드려야지’하는 행위적 결심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 남을 돕는 것보다 믿음으로 향유를 깨뜨린 행위가 더 중요하다 ‘는 것도 아닙니다. 그 집에 들어설 때, 그 여인이 아직 향유를 깨뜨리기 전부터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의 중심을 아시고 먼저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삶을 절제하고 통제하고 말씀으로 채찍질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그 모든 용모와 행위를 갖추기 전에, 나는 과연 내 모든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는 귀한 시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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