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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Apr 20. 2023

율법과 자유 사이

나를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게 되는 자

율법과 자유 사이 (롬 8:1-9)


대학생 때 기회가 생겨 무료로 일본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하며 참 인상 깊었던 것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를 뽑으라면 사람들의 친절함이었습니다. 일본 여행 중 다른 사람의 발을 실수로 두 번 밟았습니다. 한 번은 사진 찍다가 뒷걸음질하면서, 한 번은 만차인 버스에서 내리는 길에. 흥미로운 것은 두 번 다 제가 밟았는데, 두 번 다 제가 사과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누군가의 발을 밟거나, 유모차 혹은 카트를 끌다가 앞사람 발 뒤꿈치에 부딪힐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째려보는 눈빛과 성난 표정을 만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독특한 일인지 모릅니다.

버스에서 가이드분께서 일본 사람들이 특히 친절한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본은 집단 따돌림 문화가 많아서 조금 잘못하면 그 책임에 대해 사람들이 엄중하게 묻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아이들이 점심을 만들어 먹기 위해 반찬을 하나씩 가져와야 하는데, 한 명이 반찬을 안 가져오면 그냥 한소리하고 재료를 섞어 비빔밥을 만들어서 같이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아이들은 한 명이 반찬을 안 가져오면 책망은 하지 않지만, 모두가 그날 점심을 굶는다고 합니다. 반찬을 준비해 오지 않은 아이가 커다란 책임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뭐,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 친절이 집단 따돌림을 피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친절의 의미는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집단 따돌림과 비슷한 문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흔히 00 빌런이라는 이름을 붙여 잘못한 사람들을 온라인에 공개하고 다수가 비판하는 일이 자자합니다. 이제 이런 기사는 하나의 종류가 되어 인터넷 어디든지 욕하고 싶은 종류의 사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덕분에 많은 빌런들이 자신의 잘못을 일찍 사죄하고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절제는 집단 따돌림을 피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회개와 절제는 마치 앞서 말씀드린 일본 사람들의 친절처럼 진실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공개비판, 혹은 집단 따돌림이 사람의 행실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율법이 할 수 있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것으로 인한 처벌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처벌을 피하기 위해 율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법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뻔히 악하고 못된 수법인 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 법률로 제정되어 있지 않거나, 혹은 특정한 선까지만 죄로 인정한다고만 하면 그것을 활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들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으나, 속으로는 시체가 썩고 있는 무덤으로 비유되었던 것처럼, 행위만으로는 선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신앙생활을 율법으로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너는 엄마를(아빠를) 왜 사랑하니?'라고 물어봤는데, 자녀가 '사랑해야 하니까'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소름이 끼치겠습니까? 율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께 이처럼 소름 끼치는 사랑 고백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목사님, 보세요.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같은 장의 앞선 15절에서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켜라, 하는 명령문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리라, 'Obey'가 아니라, 'you will obey'입니다. 차이가 굉장히 큰 겁니다. 이것을 문법으로 조건절이라고 합니다. ~하면,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행위의 조건이 되는 것은 곧 사랑이고, 그 사랑이 있으면 너희는 반드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될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21절의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는 표현은 '나를 사랑함으로 나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중점은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절에서 언급한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전지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인간을 지으시면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벌어질 일과 결과를 뻔히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굳이 그런 자유를 주셔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해서 사랑해요'하는 소름 끼치는 고백이 아니라, '저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요'하는 진정성이 있는 고백을 받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뿌리 깊은 죄의 역사가 도리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역사 속의 죄인들을 향해 성경은,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해'


구원을 받은 성도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으로 인해 오는 처벌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유를 진정으로 즐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짓고 싶은 죄를 지으면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원래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고 악한 것에 더 많은 눈길을 주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선택 같으나, 실상은 손 발이 묶여 죄가 끌고 가는 대로 이끌리는 자유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슬을 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모든 행위로 하나님께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힘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삶이 바로 율법을 이루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시편에 등장하는 시편 기자의 찬양을 암송하고 따라 하는 신앙에서 멈추지 말고, 자신만의 시편을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자연스럽게 연애하는 사람을 보면서 '사랑을 책으로 배웠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할 때, 사랑과 관련된 행위를 연구하고 따라 하면 어색하지만, 거짓 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표현하면 그 행위가 자체로서 온전한 것처럼, 율법을 따르기 위해 율법을 묵상하면 어색하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그것을 표현하면 그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지만 허락된 자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싶지만, 종종 말씀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말씀은 너무 나에게 부담이 되는데'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데, 내 삶에서 그러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을 보면서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부족한 모습, 지금 맺지 못한 열매를 보며 탄식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가 될 모습을 미리 바라보고 계십니다. 사람 낯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를 뛰어다니며 예수님이 왔다고 소리칠 것을 보셨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가 마음을 돌이켜 십자가에서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예수님을 전할 것을 보셨습니다. 창 밖에 있는 벚꽃 나무의 벚꽃이 이젠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열흘정도 피어있던 벚꽃이 이제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 나무를 여전히 벚꽃나무라고 부릅니다. 벚꽃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리고 그것이 피어도 일 년 365일 중에 채 2주도 되지 못해 모두 떨어지지만, 저것은 여전히 벚꽃나무입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참으시고, 우리 안에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만으로도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마치 벚꽃이 없는 벚꽃나무를 보고 그것이 벚꽃나무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자유합시다. 자유롭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따릅시다. 그리고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볼 때, 나도 모르게 성취한 율법들이, 나도 모르게 피어낸 꽃과 열매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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