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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 Nov 14. 2022

결국, 닿는...

에세이 연습 과제 11 - 가족이란, 가깝지만 멀었던...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특히 혼자 떠나는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여행을 좋아했다. 아무래도 세상의 속박에 굴하기를 즐기지 않고 삶의 굴레를 지기 싫어하는 성향 탓인 것 같다. 무얼 하든 소진된 내적 에너지를 오롯한 고독에서 충전하려는 기질 때문인 듯도 하다. 그래서 20대 때는 자주 떠났다. 어디로든 훌쩍, 진정한 자아를 찾겠다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국을 떠났다. 생판 모르는 곳에 홀로 뚝 떨어졌을 때, 비로소 깨닫는 혼자란 느낌,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 한 번도 걸어 보지 않은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 이런 복잡한 감정의 타래 속에서 희한하게도 나는 나다움을 찾아냈다.


‘어? 나, 길 찾는 거 되게 잘하네?’

‘와, 나 영어 되게 잘하는구나... 다 알아듣고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잖아?’

‘웬일이야, 내가 이렇게 사교적이었나? 처음 보는 사람하고 이렇게나 대화를 잘한다고?’


나다움은 오롯이 주어진 고독 속에서 제 빛을 발하곤 했다. 나도 모르는 새로운 면을 내 속에서 발견할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 앞에서 도전적이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나를 보노라면, 자신감과 용기가 샘솟고 자존감이 올라갔다. 그래서 혼자 하는 여행이 좋았다. 이런 방랑벽 탓에 나의 20대에는 가족에게 소원했다는 빈틈이 생겼다. 매 순간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때였기에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동아들로 자라, 가족으로 북적대는 명절을 바랐던 아버지를 뒤로하고, 유일한 며느리로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어머니의 분주함도 무시한 채 며칠씩, 또 몇 주씩 무심히 여행길에 오르던 때였다. 가족이란 존재 자체가 곧 인생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할 적이었다. 고독이 곧 나의 정체성이자 상징이라 여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왔고, 삶을 저버릴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족이란 혈연의 소중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엄마가 내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자기희생에 익숙한 엄마에게 고스란히 남아있던 그녀의 결핍은 못내 가슴 사무치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본 엄마는 제 속에 자기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 끝끝내 자신으로 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1950년대에 태어난 엄마는 70년 가까이 이 세상에 머물며 여린 몸으로 밥하기가 싫어도 매일 밥을 짓고 빨래하기가 싫어도 매일 빨래를 했다. 쉬고 싶어도 돈을 벌었고 여행을 가고 싶어도 묵묵히 집안일이나 해야 했으며 몹시도 어렵고 무서운 시부모를 죽을 때까지 돌보았다. 엄마는 며느리가 되기 싫어도 며느리가 되었고 엄마는 엄마가 되기 싫었어도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가장 저답고 싶었을 때도 스스로를 버리고 떠맡은 다른 역할들을 먼저 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밥 먹는 것 대신 낮잠이나 푹 자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엄마도 그랬을 테고, 귀찮아서 미루고 미룬 빨래를 색깔 구별 없이 한 데 넣어 그냥 빨아 버리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 테다. 휴가철에 훌쩍 해외로 몇 날씩 여행을 떠나는 내 뒷모습을 하염없이 부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딩크로 살 거라고 당당히 외치는 나를 닮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아픈 자식 앞에서 어느덧 엄마 안에는 엄마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언제고 돌아오도록 자신을 비워 품을 열어 두고 있었. 내 두 손안에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는 몰랐던 감정이었다. 건강을 잃고 여유가 사라져서야 끝까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에게 느끼는 연대의 소중함은 몇 가지 단어의 나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힘들고 아파 보니 알겠다. 지치고 여윌 때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왜 집으로 향하는 지를. 집이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집에 있는 엄마, 영원히 나의 편에 서 있는 사람, 나의 고생과 역경을 못 본 체 할 수 없는 이들, 그들의 격려와 온기에 닿고 싶은 까닭이라는 을.


나는 더 이상 고독 속에서 자아를 찾지 않는다. 나는 지금 사람 속에 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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