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에세이 연습 과제 12 -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존재
몇 해 전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라는 에세이를 읽고 그가 정리한 ‘사랑’의 정의에 동감한 적이 있다.
‘사랑이란 종족을 만들고 보존하며 퍼뜨리려는 생물학적 본능에서 기인하는 순간적인 감정이다.’
물론, 독설가이자 염세주의자답게 그의 말은 이성 간의 사랑에 해당하는 아주 솔직하고 원초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이 말에 내포된 속뜻은 좀 더 따뜻한 양상을 띤다. 그의 행복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행복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서 사랑받는 행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감 그리고 고독을 사랑하는 행위에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나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으려 했을 때 나는 불우했다. 내적 만족이 아니라 외적 보상과 그럴싸한 평가를 받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채찍질했고, 권위자에게 인정받는 것이 곧 나를 대표하는 소속감이자 능력의 발현이라 생각했기에 과로하기 일쑤였다. 자연히 내 삶의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걸어가는 과정 역시 타인의 구미에 맞춰 설정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내 시간과 인식의 상당 부분이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애써서 받은 칭찬 중 희한하게도 지금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말에도 무게가 있는 건지, 솜털처럼 가벼운 탓에 깨끗하게 휘발한 듯하다. 대신, 타인의 칭찬을 갈구하던 과정에서 마주한 비난은 비석 위에 각인된 묘비명인 듯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정도밖에 못하냐는 타인의 빈축은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그래, 더 열심히 해야지!’가 아닌 ‘왜 난 이것 밖에 못하지?’라는 자학성 멘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밖에서 유입된 힐난은 거북하리만큼 잔인한 수치심이 되어 내부를 폭파하는 살인 무기로 변해갔다.
온몸과 마음이 터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제 일의 존재는 반드시 나여야 함을.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옥죄던 완벽주의로 무장한 기대치를 지워나갔다. 하루에 해치워야 할 할당량을 목표치로 잡고 그것을 완수했을 때는 성공적인 하루를, 그렇지 못했을 때는 실패한 하루를 살았다고 여기는 극단적 습관을 버리려 노력했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편안하게 살아 보자는 마음, 그 마음만 가지고 시간을 보냈다. 마음 한구석에 억지로 만든 이 공간은 자그마한 여유가 되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내 감정을 살필 수 있었다.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에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사랑했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한 찝찝함이 나를 사로잡기 전에 먼저 최선을 다했는지를 살폈다. 최선의 결과라면 그저 받아들이고 거기서 만족했다. 하나의 큰 덩어리였던 불만족이 여러 개의 작은 만족감으로 쪼개지며 자연스레 나 자신을 바라보는 기대치가 조정됐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무너지지 않을 선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애쓰기를 멈춘 것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는 삶을 살자, 나에게서 사랑스러운 구석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넙데데한 것이 아니고 동그란 편이었고, 나는 공격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줏대가 뚜렷한 성격이었다. 나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직업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중이었고, 사회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고독을 즐길 따름이며 예술성과 창의성이 발달한 사람이었다.
미처 사랑하지 못한 나를 사랑하고 나서야, 완벽하리만큼 불완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고, 내가 나를 믿고 아끼는 것이 행복과 만족의 첫 번째 열쇠라는 것을 깨닫는데 40년이 걸렸다. 무상히 지나간 세월만큼, 앞으로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중시하는 나로 지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