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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 Nov 16. 2022

퇴근길

에세이 연습 과제 13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퇴근길이다. 출근길과 똑같은 길이 퇴근길이란 이름표를 다는 순간부터 즐거운 소풍길이 되는 마수에 걸린다. 퇴근길은 시시 때때의 기분에 따라 불현듯 떠날 수 없는 길이다. 낮 동안에 주어진 몫을 다해야만 얻을 수 있는 땀과 노력의 부상 같은 것이다. 퇴근길에 오르는 여정은 하루를 잘 갈무리하는 것과 같다는 맥락에서 궁극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출근이 곧 퇴근을 보장한다는 마음으로 지옥보다 더한 출근길을 매일 아침 굳건히 달리는 것이리라.


퇴근길이 선사하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나로 하여금 전에 없이 특별해질 수 있는 배경이 된다. 퇴근길 위를 굴러가는 차 안에서 나는 현실에서는 돼볼 수 없었던 라디오 디제이가 되기도, 유행가의 반주에 맞춰 가사를 내뱉는 가수가 되기도, 어제 본 영화 속 여주인공의 대사를 흉내 내는 배우가 되기도 한다. 이 순간만큼은 화자도 청중도 모두 나이기에 부끄러움도 수치도 없이 아득한 내면에 숨어있던 모든 재능을 내보일 수 있다. 무의식의 이드와 의식의 주체인 이고가 합치하는 동안 직장 스트레스는 저만치 훌훌 날아간다. 이쯤 되면 퇴근길이 레드카펫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지미추 하이힐을 신고 베르사체 드레스를 걸친 채 섹시한 주단을 걸어 시상대에 오르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수상자가 된 것만 같다.


퇴근길 위에 간헐적으로 포진한 과속 카메라가 농락하듯 내 상상을 방해한다. 구간단속 구간에서 시속 80킬로미터로 안정을 되찾을 즘이 되면, 어느새 집 앞이다. 궁극적으로 출근이 퇴근을 위한 시작이라면, 퇴근의 궁극적 목적지는 집이 된다. 퇴근길 끝에 다다른 집은 나에겐 요람처럼 편안한 곳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내 얼굴에 여러 겹의 가면을 씌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인위적 페르소나 뒤에서 느끼는 갑갑함과 답답함을 인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사를 겪다 보면, 본연한 자아는 흐려지고 후천적으로 학습된 성격만 덩그러니 남기도 한다. 내가 사라지며 남긴 육체적 긴장감과 정신적 부담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는 곳으로는 집이 가장 만만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퇴근 후 맞이하는 해방감과 드디어 혼자라는 충만함을 느끼기에는 내 방 침대만 한 곳이 없다. 침대 위에 털썩 누워 포근하고 포슬포슬한 침구에 폭 싸인 때의 안온함과 노곤함이 퇴근 후에 느끼는 감정의 정수가 아닐는지...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루틴을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날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나를 응원하는 나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앞으로 8시간 후면 퇴근이니, 파이팅!’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떠오른 오늘의 태양을 바라본다. 왠지 출근길 위에 늦은 오후의 석양이 어른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착각으로 또 하루를 견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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