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를 배운 지 4년이 넘었다. 성인 취미반수업은 대부분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손날이 시커멓게 될 때까지 스케치북을 문지르며 4B연필로 선을 긋고 면을 짓는 기초 드로잉을 짧으면 한 달, 길면 두 달 안에 끝낸다. 기초 드로잉 후에 바로 유화나 수채화로 넘어가는 사람도 많다. 자기 방에 멋지게 걸어두고도 싶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척척 주고 싶기도 한 것이 초보 화가의 욕망이자 꿈이기 때문일 테다.
나는 기초 반 이후 선생님이 유화를 권했음에도 연필소묘를 계속했다. 드로잉의 기초 중에 기초인 연필 소묘에 집착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깊이, 내 그림에 깊이를 더하고 싶어서였다. 텅 빈 흰 종이 위에 그인 흑색의 연필 선은 몹시 담백하다. 한 번 지나간 연필 선이 또 다른 선을 자꾸 만나다 보면 색이 점점 진해지고 모양이 입체적으로 변한다. 연필에 연필이 더해질수록, 선에 선이 쌓일수록 한층 더 그윽한 깊이가 새겨진다. 그렇게 연필을 계속 쓰다 보니 이제는 그 고유한 매력에 푹 빠져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됐다. 연필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 사람은 때로 의아할 만큼 아집스러워진다. 항상 목표를 향하거나 남보다 앞서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현대인의삶 속에서도 사랑은속도를 멈춘 채 한참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한다. 내가 색색의 물감을 앞에 두고도 흑백으로만 표현되는 연필을 계속붙잡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세상에 유일무이로 존재하는 사랑하는 이에게 진득이 집중하면, 서로를 서로에게 차근히더하다 보면 으레관계가깊어지기마련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람을 오래, 그리고 깊이 알아가는 것이 더욱 회자되는 세상이다. '1년에 열 사람을만났다'보다 '한 사람을 10년 동안 사랑했다'가 세간의 입에 더 오래 오르내리는 이유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사랑의황홀함, 깊어서 황홀한 까닭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