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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 Dec 08. 2022

그때 그 마타하리

그리고 지금 여기, 나.


세상은 겨우 일부를 가지고 누군가의 전부로 여기는 성급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시선의 위험성은 바로, 상황과 여론에 따라 긍정적이었다가도 부정적으로 시시각각 바뀔 가능성이 농후한, 상당히 주관적이고 근시안적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마타하리도 당시 새로운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열광하던 프랑스인에 의해 동양의 신비로운 춤을 추는 젊고 예쁜, 예뻐도 너무나도 예쁜, 무희이자 괄목할 예술인으로 불렸다. 마타하리에게 이런 평을 내린 프랑스인 중, 인도 자바의 전통춤이라 이름 붙인 그녀의 예술 행위가 실은 인간 상상력의 말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애석하지만 말이다. 마타하리를 향한 또 다른 시선은 당대 남성들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던 몹시 독립적인 여자라는 평이다. 자신의 커리어와 재정적 후원을 위해 타고난 육체와 성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매력적이고 전략적으로 사용한 측면에서 보면 그랬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이중 스파이 – 프랑스의 지속적인 군사적 패배와 그로 인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비난에서 관심을 돌리려는 대상으로 선택된 – 로 몰려 처형 당할 즘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며 몰상식하고 부도덕한 창녀에 불과하다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과연 마타하리는 누구인가? 


결혼에 실패한 이혼녀인가, 한 아이의 어머니인가, 이상한 동양의 춤을 추며 노출로 이목을 끈 무희인가, 진정한 예술가인가, 뭇 남성들의 정부인가, 당대 사교계의 질투와 관심의 대상인가, 창녀인가, 이중간첩인가, 아니면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인가? 누가 이 세상에서 40년 남짓 머물다 간 그녀에게 이토록 많은 이름표를 달아 주었을까?


‘마타하리’라는 한 명의 여인에게 붙은 세상의 평은 셀 수도 없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평판의 맥락에서, 그녀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예술가이자 매혹녀이다가도 곧 명성 바랜 추한 몰골의 간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녀가 매 순간 자신의 선택으로 인생을 꾸렸다는 점이다. 이중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마타하리는 자신의 무고한 결백을 주장했으며 함정과 음모로 점철된 폭력과 권력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타하리가 이중 스파이라는 근거가 불충분했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했다.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 몸부림치던 권력층이 그녀의 죄를 ‘당대 여느 여인들과는 다르게 지독히도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는 것’으로 규정했을 뿐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흔쾌히 수용하겠다는 마지막 결정이 끝까지 스스로‘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로 살게 한 것이다. 남자로 대변되는 권력층에 의해 비열하게 덧씌워진 그녀의 죄명에 비한다면, 사뭇 용감하고 당당한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도 여전히 무고한 삶들이 모종의 권력에 의해 바스러지고 있다. 권력이 희생시킨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통틀어 봤을 때, 그들이 정말로 죽어 마땅한 이유를 지녔을지는 미지수다. 인간은 항상 지극한 일부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며 살아가고,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거나 앞서간다는 아주 통속적인 이유로도 논란을 일으킬 따름이니. 


타인에 의한 평판은 종류를 불문하고 내 본연의 모습이 될 수 없다. 세간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나'로 살고자 하면 그것이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일 뿐임을 믿는다. 마타하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를 자신의 엄숙한 숙명으로 선택한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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