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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Jan 25. 2021

체코 사람들이 겨울을 즐기는 방법

Winter story in Czech


지난밤사이에 또다시 함박눈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지난겨울에는 기다리던 눈 소식이 참 더디기만 하더니 올해는 한국도 이곳도 징글징글하게 눈이 내릴 모양으로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겨울철에 원래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광장이나 도로의 제설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고 확실해서 다니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다.


눈을 '아름다운 쓰레기'라고 여기던 나였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함박눈에 설레어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이 겨울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다. 

내딛는 발마다 푹푹 꺼지는 눈밭을 밟으며 한참 걸어온 까마득한 길을 뒤돌아 보면 하얗게 다시 메꾸어지고 있다.

'이런 기분 좋은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야'

뽀드득뽀드득 발이 빠지는 느낌이 좋아 저 멀리 뛰어다니는 강아지 마냥 천진한 얼굴로 눈밭을 나아간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의 출퇴근은 겨울의 함박눈 운치를 귀찮고 의미 없는 일로 여기게 만드는 대단한 힘이 있었지. 여러 의미에서 그것도 참 대단한 일이다.




함박눈으로 뒤덮인 체코 프리덱미스텍의 전경

평소의 겨울 풍경이라면 다소 삭막해 보이던 저 아래 마을 위로 조용히 내리는 눈 오는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보기 싫었던 조잡한 색들을 동일한 색으로 뒤덮어 버리니 을씨년스럽기만 하던 겨울의 풍경이 조금은 로맨틱해진 것 같다.

차가운 눈이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다니.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야 분명히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해도 눈 오는 날은 뭔지 모를 설렘으로 몸과는 달리 마음이 간질간질할 거야.


두꺼운 눈 이불로 폭닥하게 덮인 길 위에 사람들과 강아지의 설레는 무게만큼 자국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이 설렘으로 누른 발자국은 낭만으로 새롭게 뒤덮이겠지.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에서 설렘 0.5g이 가감된 만큼 경쾌하고 가벼운 무게가 느껴진다.




이곳은 건조해서 눈이 내려도 잘 녹지 않고 금세 쌓여 버린다.

광장의 헐벗은 청년 플로리안의 어깨에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기온이 낮은 밤사이에 눈이 내려 쌓이고 낮에는 그치기를 거의 일주일 내내 반복하고 있는 체코의 겨울 날씨이다.

오늘 약간 해가 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눈.눈.눈 표시가 날씨 어플 화면 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동유럽의 아침은 느릿느릿 느림보 같이 8시가 훌쩍 넘어야 해가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더디게 시작하는 체코의 낮은 또다시 오후 3시면 해가 지기 시작해 4시면 깜깜 밤이 되어 버리는데, 그나마 해가 뜨는 화창한 겨울 날씨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극소량의 일조량마저 앗아가는 안개와 비와 눈이 내리는 날들이 이어지다니... 오래된 지병이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의 겨울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집에서 마냥 움츠러들기 쉬운 계절이고 그저 '스테이엣홈'이 미덕이 되는 시기이지만, 짧은 가을이 가고 눈과 함께 찾아오는 긴 겨울을 이런 기후에서 평생을 살아온 체코인들을 따라 현명하게 보내야 할 것이다.







안개, 겨울비, 눈이 우울하게 이어지는 겨울철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체코 사람들은 이 겨울에 매우 유쾌해 보인다.

다른 계절 동안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썰매를 꺼내 온 가족이 눈밭으로 나온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프리덱은 주변의 다른 마을에 비해 높은 지대에 있어서 눈썰매 초보자들이 즐길 짧고 완만한 동산도, 다소 위험한 익스트림을 즐길 만한 길고 급격한 언덕도 있다.




'오호라 여기가 눈썰매 핫스팟 이로구나.'

아니나 다를까 언덕으로 나와보니 옆동네 미스텍에서도 눈썰매 원정을 나온 것 같은 꼬꼬마들이 이미 눈썰매 삼매경에 빠져 있다.

이제 언덕에 도착한 소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언덕의 라인을 체크하면서 출정의 각오를 다져보는 것 같다.


체코는 바다가 없어 여름 스포츠는 대부분 바다가 있는 휴가지에서 즐기지만 겨울에는 국경 근처에 스키장이 많아 어릴 때부터 썰매를 타고 스키 캠프도 많아 대부분 겨울 스포츠를 즐긴다고 한다.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창고에 잠들어 있던 눈썰매를 정비해 앞동산으로 나온 것이다.





그동안 봐온 체코 사람들에게는 즐길거리가 많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술을 좋아하고, 또 술을 좋아하고, 매우 많이 맥주를 좋아하는데 겨울에는 조금 달라 보인다.

설산으로 스키와 보드를 즐기러 나가고, 얼어붙은 호수나 강에 들어가 체코 전통의 얼음물 수영을 즐긴다.

조금 더 건강해 보이고 건전해 보이는 체코 사람들의 겨울나기.




덥다 덥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여름이 어느새 지나는 것과 같이, 춥다 아춥다 타령을 하다 보면 이 길고 긴 겨울과 겨울왕국도 조금만 더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시기가 돌아올 것이다.


즐기자. 겨울에 즐길 수 있는 이 모습들과 혹독한 추위를 마음껏 즐겨두자.

지난겨울의 프라하 크리스마스 마켓처럼, 브로츠와프의 겨울 여행처럼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곳은 흰 눈으로 뒤덮인 작은 마을이다.

하루 종일 신나게 눈썰매를 즐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가 따뜻하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콤한 핫 초콜릿 한 잔을 만들어 줄 것이 분명하다.


차디찬 눈밭에 뒹굴며 겨울을 쏘다니는 이유는 '따뜻한 것'을 찾기 위함일지도.

나도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꽁꽁 언 손과 몸을 녹여줄 따뜻한 핫 초콜릿 한 잔을 만들어야지.




집으로 돌아와 마시는 뜨거운 핫 초콜릿



https://youtu.be/JltfpOF1k1o?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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