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아스파라거스 Spargel
처음 만나 뵙겠습니다, 슈파겔
시장을 지나야 만 집으로 갈 수 있는 동네에 살았었던 그때엔 보통 계절의 변화를 과일가게, 야채가게 앞을 지나다가 불현듯 알아차리곤 했다.
5월 중순을 지나면 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너무 익어서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달큰한 딸기향이 사라지고 유치한 색상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봉긋하게 담긴 살구, 자두, 천도복숭아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면 머잖아, 곧 여름이 온다는 감각이 있었다.
이곳 체코 마트에도 머잖아, 곧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납작 복숭아가 올해 첫 등장을 했다.
아직은 내가 원하는 익은 정도가 아닌 것 같아 살짝 누르면서 손에 쥐어본 과일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뒤를 돌아보니, 매대에 하얀 아스파라거스인 '슈파겔 Spargel'과 홀랜다이즈 소스 상품들이 요란한 광고판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봄에는 슈파겔 먹어줘야제!'라는 말이 분명하다.
이른 아침에 장을 보러 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카트 안에도 뽀얀 슈파겔 묶음들이 하나 둘 담겨 있다.
체코도 이럴진대 하얀 아스파라거스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더 요란하게 즐겨 찾는다는 4~6월이 제철이라는 슈파겔과 나의 첫만남이다.
나는 본디 새로운 음식과 재료에 대해 매우 강한 호기심을 보이고, 새로운 것은 우선 입에 넣어보고야 마는 습성이 있다. 늘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반평생 먹지 않았던 가지를 가지 튀김으로 첫인사를 하고 나서 '가지 덮밥'과 다소 레벨이 높은 '가지나물'까지 먹게 되는 인생 레벨업을 맛보았고, 단골로 가던 망원동 작은 이자카야에서 추천받아 제철 우니(성게)를 접한 후에 초여름엔 꼭 우니를 먹으러 갔다.
'가지는 색이 이상하고 물컹해, 우니는 바다 비린내가 너무 나서 싫어!'
그동안 가지와 우니를 부정했던 나는 그야말로 뭣도 모르는 바보였다.
내 앞의 체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나 역시 일말의 의심도 없이 고무줄에 묶인 슈파겔 한 묶음과 그의 짝꿍인 홀랜다이즈 소스 한 팩을 거침없이 집어 들었다.
'그래, 뭔데 그렇게 환장하는지 나도 맛 좀 보자! 나만 그 맛있는 맛을 모르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감자 깎는 칼로 질겨 보이는 껍질을 벗겨 내고, 밑동은 칼로 잘라내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소금을 넣은 물에 슈파겔을 넣어 약간 투명해 보일 정도로 삶았다.
너무 오래 삶으면 너무 흐물흐물해질 것 같고, 조금 덜 삶으면 너무 딱딱해서 못 먹을 것 같아서 냄비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있는데, 채소를 물에 데칠 때 나는 비릿한 향이 많이 나서 슈파겔을 잠깐 의심하기도 했다.
슈파겔은 이 계란 노른자와 버터, 레몬즙으로 만들어진 홀랜다이즈 소스와 함께 먹는 것이 보통인데, 맛을 보니 둘은 그냥 짝꿍이었다.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
물론 이것은 채소이고, 계란 노른자 소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호불호는 나누어지겠지만, 오늘부로 '봄에 꼭 슈파겔을 먹는 사람들 조합'에 가입한 사람이 저요, 여기 한 명 있습니다!
슈파겔 먹는 기간에는 이것이 메인이고 사이드로 삶은 감자, 슈니첼, 구운 소시지 같은 것을 사이드로 함께 먹는다고 한다.
순전하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안에서 물컹하게 씹히는 질감과 섬유질이 꼼꼼하게 저작되면서 내는 향기가 봄, 체코의 봄을 곁으로 불러오는 것만 같았다.
이국의 계절을 테이블로 소환하는 음식, 과카몰리
봄을 테이블 위로 소환하는 것이 삶은 슈파겔이라면, 테이블 위로 이국의 여름을 데리고 오는 것은 '과카몰리'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나는 이태원의 멕시칸 요릿집으로 달려갔다.
에어컨을 켜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어둔 멕시칸 타코 집에서 시원한 맥주와 도톰한 쉬림프가 올라간 소프트 타코,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과카몰리를 앞에 두고 여름을 맞이하곤 했다.
먹으면서 땀을 좀 흘리긴 했지만, 그 감각이 나에겐 여름이었다.
멕시코에 가본 적도, 가볼 일도 없겠지만 충분했다.
과카몰리를 먹기 시작하면 나에게 여름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올해도 첫 과카몰리를 한통 만들었다.
과카몰리는 아보카도와 소스라는 단어를 합친 이름으로 아보카도, 양파, 토마토, 레몬즙, 소금, 올리브유로 뚝딱 만들 수 있는 '이국의 여름 맛'이다.
잘 익은 아보카도만 준비하면 만들기도 아주 쉽다.
여기엔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야 하는데, 라임을 한쪽 잘라 올린 멕시코산 코로나 맥주 한 병이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인 기분으로 만들어 주는 음식, 후무스
비정기적으로 채식을 지향하는 삶.
몇 달 동안 고기와 생선의 섭취를 끊고 '비건'처럼 삶을 사는 일은 나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일종의 행사이다.
친구들은 또 시작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잘 맞추어 주기도 한다.
비건 식당을 검색해와서 함께 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비건용 식품이나 레시피를 추천해 주기도 한다.
이태원의 아랍 식당에서 처음 맛본 '펠라펠'과 '후무스'는 이런 나의 '비정기적 비건 생활'에 즐거움을 더해주는 음식들이다.
병아리콩이라는 뜻을 가진 '후무스'는 삶은 병아리콩과 올리브유, 소금, 향신료를 넣고 스프레드처럼 만든 것이고, '펠라펠'은 이것을 경단처럼 뭉쳐서 튀긴 중동의 향토 음식이다.
예전엔 이태원의 중동 음식점에서만 주로 볼 수 있었지만, 비건과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려지며 지금은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후무스를 만드는 회사도 많아져서 다양한 맛과 질감으로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얼마 전 슈퍼에서 사 온 것은 카라멜라이징 된 양파를 함께 갈아 만든 후무스로 은근하게 느껴지는 구운 양파 맛이 정말 좋았다.
바삭 구운 호밀식빵에 후무스를 넉넉하게 바르고 매콤한 칠리 플레이크를 솔솔~ 뿌려 먹으면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그 맛이 일품이다. 이쯤 되면 이런 것들을 먹기 위해 진행되는 '비정기적 비건 생활'이 아닌가 싶어 진다.
필리핀에서 먹었던 아삭하고 달콤한 모닝글로리 볶음은 이태원의 동남아풍 레스토랑에 가면 꼭 찾게 되었고, 봄에는 독일식 슈파겔, 여름에는 멕시코식 과카몰리, 가을에는 시나몬롤과 일본식 캬베츠롤, 겨울에는 유럽식 글뤼바인에 달콤한 슈톨렌 한 조각!
여전히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광활한 신세계가 남아있다는 것이 오늘도 행복하다.
슈파겔과 과카몰리가 테이블에 올라오는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