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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Jun 06. 2021

[짧은 서평]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바닥을 딛고 있는 발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의 깊이로 밀려오는책

 이 책을 접하게 된 건 회사의 독서 동호회에서 각자가 책을 추천하고, '사다리 타기'를 통해 뽑히면서였다. 책의 제목을 읽고 '시선; 눈의 시각이 향하는 방향', 그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는 건가. 요즘에 인기가 있는 그런 감성의 책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첫 장의 가계도를 보고 그 생각이 선입견이라는 걸 알았고,  또 등장인물을 외우느라 애 좀 먹겠다는 걸 직감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0367403?OzSrank=1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에 영 소질이 없는 나는, 이름을 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읽다 보면 어림잡아지겠지, 싶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다. 등장인물이 나오는 순간마다 가계도를 보기 위해 첫 장으로 가지 않게끔 작가는 짧게라도 그 인물의 특징을 설명했고, 그 특징들이 하나하나 다 뚜렷했다. 그래서 내가 문득 궁금해하지 않는 이상,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워 앞장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심시선'이라는 교집합의 환경에서 지내온 사람들이, 하와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심시선을 기리기 위한, 기억하기 위한 물건들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은 책이다. 그 과정에서 같이 아파하기도 하고, 유쾌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격렬하지 않게, 잔잔하게 치유를 받는 느낌이라 읽는 내내 마음속에서 작은 생동감을 느꼈다.



 "언니는 따옴표 같지. 늘 진지하니까. 나는 좀 정신없어서 쉼표 같고, 우윤이는 기본 표정이 물음표고, 의외로 해림이가 단단해서 마침표고. 너는 말 줄임표다, 말 줄임표."

p.175



 나는 어떤 문장 기호일까, 혼자 고민도 해보고. 너무도 흔하지만 겪을 때마다 나를 너무 아프게 하는 환경에 회의감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부딪히고, 흘려보내고, 짚어주며 그 환경을 극복하는, 아니 극복한다는 말도 너무 비장한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힘을 얻기도 한다. 불타오르며 힘을 내는 게 아니라 흙을 덮어주는 느낌. 내 기반을 손으로 강하지 않게 톡톡 두드리며 다져주는 느낌.


얕은 감성을 좋아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깊은 감성도 버거워하는 터라, 책 한 권을 시작하기 힘든 요즘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들여다보면 바닥을 딛고 있는 내 발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의 깊이로 밀려오는 물결 같아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은 구절 중 하나를 소개하며 끝맺겠다.



우윤은 몇 번 더 시도했고 다시 그렇게 멋지게 타지는 못했지만 전보다는 나았다. 그럴싸했다. 경직되었던 부분들이 기분 좋게 풀어졌고 깊이 빠졌다가도 물을 먹지 않고 올라왔다. 보드 위에 앉아 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주었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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