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아 피천득기념관에 앉아 아무도 없는 고요 속에 머물고 있으면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게 살다가신 피천득 선생님의 물결이 내 안에 흐르는 것 같다.
나 홀로 피천득 선생님께서 살아생전 몸에 걸치고 쓰시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있노라면, 아득히 멀게만 보였던 든든한 지원군이 곁에서 버팀목처럼 지켜주고 계신 듯 든든해진다.
영상 속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면 맑은 샘물이 졸졸 산골짜기로 흐르는 것처럼 마음이 싱그러워진다.
드문드문 인적 드문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내게 어떤 메시지를 주러 온 신의 모습 같다.
연로하신 할아버지께서 점잖은 모습으로 둘러보시다 '이제 너는' 시구절이 적힌 벽을 한참을 보신다. 서툴게 휴대폰 사진기로 촬영하시고 떠나시는 뒷모습이 눈에 머문다. 그 벽에 기대앉아 피 선생님의 인터뷰를 보고 있던 나는 존재 없이 그곳에서 하나의 소품이 되고 선생님의 동심 속 하나가 된다.
핑크빛 코트를 입고 온 점잖은 숙녀를 바라보며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된다. 큰맘 먹고 산 딸기우유색 코트를 환불하지 말아야지. “입고 싶은 옷은 입고 살아.” 라며 피 선생님이 피식 웃으시며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 마음이 분홍해진다.
그곳에 온 사람들과 찰나에 스쳐갈지라도 한 공간에서 연대하는 시간이 좋다. 알지 못하면 찾아올 수 없을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정이 간다. 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 어떤 눈길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지금 내가 가는 곳에는 나 같이 순한 사람들과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