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고 있는 경주 ‘황리단길’에 대하여
'황리단길'이라 이름이 붙은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몇 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거리의 활력에 놀라 저는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이 보차도 분리도 되어 있지 않은 2차선 도로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으며 즐기는 모습은 이곳을 찾은 기대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경주를 방문한 관광객으로서 새롭고 신선하고 활력 있는 상가거리에서 느끼는 즐거움보다는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문화유적지에 대한 기대가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경주에는 높은 건물이 없을까?”라는 기초적인 궁금증은 경주를 방문하는 모든 관광객들이 갖는 공통된 의문이며, 경주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설명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경주는 땅만 파면 문화유적이 나오는 동네인지라 건물의 증개축이 어렵고 고도제한도 심해서 높은 건물이 없어.”라고 말이죠. 자세히 찾아보니 문화재 보존법상으로는 건축 문화재에서 27도 각도 밖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래된 건축물 문화재의 조망권과 유리에서 비치는 빛/그림자 등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화재가 즐비한 경주에서는 실생활구역에서도 오래된 건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법이 제정된 시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그래서인지 새로 지어지는 건물보다는 기존 건물의 구조를 활용한 공간들과 전통양식으로 재건축되고 있는 건물들이 많이 관찰됩니다. 그렇지만 처음엔 전통양식이라 인지되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주의 전통인지 우리나라의 전통인지 모를 건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몇몇 새로 지어지는 건물은 일본 여행에서 보았던 전통 건물들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어느 건물은 중국 무협영화에서 보았던 음식점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이라는 것이 시대가 바뀌며 갖는 모든 양식을 통합하여 인식하거나 특정하여 유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적어도 신라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라는 경주를 방문한 객의 입장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곳 ‘황리단길’은 전통/근대/현대/외국 양식까지 더불어져 취향들의 비빔밥이 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전통의 어느 선까지 지키고 현재에 반영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경주가 신라시대의 유적지로 유명하다고 해서 경주에서 사는 사람들이 옛 시대의 생활양식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또한 땅만 파면 유적지가 나온다는 지역에서 많은 제약을 안고 살아가는 일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전통의 보존/보전/보호와 현재의 실생활 그 사이에서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잘 지켜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황리단길’이라는 명칭을 톺아보면 그 점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명칭’이란 것은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축약해서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황남동’과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합친 단어입니다. '육군중앙경리단' 앞 길과 그 주변 골목길을 ‘경리단길’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경리단'이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죠. 건물과 연계된 거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거리가 갖는 의미와 분위기를 계승하는 단어로 변모하여 적용된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경리단길’처럼 젊은 소비층을 겨냥한 문화/음식거리를 만들려고 하여 지어진 것이라 추측됩니다. 이러한 유행은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서울의 ‘망리단길’과 ‘송리단길’, 전주의 ‘객리단길’, 인천의 ‘평리단길’, 대구의 ‘봉리단길’이 같은 예입니다. 본래 ‘황리단길’은 옛 건물이 보존되고 인근 주민이 주로 이용하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문화재 보존지역 등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건물의 증개축이 어려웠고, 이로 인해 개발이 진행되지 못한 일종의 낙후지역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관광객이 몰려들어 자연스레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지자체의 계획하에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하고 개성 있는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경주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점점 더 그 규모가 커지는 중인 듯합니다. 반면에 임대료가 폭증하면서 기존의 저소득 상인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문제로 대두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비단 ‘황리단길’의 문제만이 아닌 ‘~리단길’의 이름이 붙은 모든 재개발 지역들의 문제일 것입니다. ‘경리단길’도 이런 문제로 텅 빈 상점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하니, 자본주의적 시장화에 대한 보호와 견제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여러 선례를 통해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기존의 낙후지역이 젊은 층의 소비심리를 자극할만한 아이템들과 디자인으로 재탄생하여 발전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며, 오히려 지자체에서는 공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용자가 많아지고 덩치가 커지면서 기존의 주거지역들로 그 범위가 넓어지며 발생하는 교통 혼잡이나 소음 등은 기존 지역주민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지금의 새로운 모습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옛 거리 또는 과거의 운치가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고 고까운 마음이 함께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대립의 과정이 아닐까요. 전통적인 양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움을 더하는 과정을 통해 도시와 거리는 다시 살아나고 끊이지 않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전통을 헤치지 않을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서고 나서야 기존의 생태계가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황리단길’에도 이런 기준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 시장논리에만 맡겨두어서는 ‘경주’라는 역사 문화적 가치와 이미지를 보존하고 지속 가능한 거리/공간이 될 수 없을 거라 걱정이 되는 부분입니다.
옛말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저는 입고수신(立故受新)이라 고쳐 말하고 싶습니다. 옛것을 바로 세우고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앞을 보며 바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걸음을 받쳐 줄 수 있는 단단한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리가 단단하게 다져져 변화에도 뽑히지 않는 기단이 조성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황리단길’을 걷고 있습니다. 거리엔 젊은 사람들의 숨결이 가득합니다. 따뜻한 햇볕이 서늘한 공기를 대변하여 계절을 홍보하는 중입니다. 낯선 사람들과 익숙한 거리, 낯선 양식들과 익숙한 서비스가 있습니다. 대립되는 가치를 통하여 이 거리는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 사이로 난 길을 다음 해에도 다시 찾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