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달빛 Mar 17. 2016

학력, 학벌, 학벌주의


며칠 동안 페이스북에 '학벌주의' 이야기가 자주 보이기에 궁금해서 찾아봤다. 논란의 발단은 어떤 사람의 글이었다. 그는 페이스북 프로필에 출신 학교나 출신 부대를 입력한 사람을 비판하며 그런 페친을 차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일단 페이스북 프로필에 그런 큰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이 놀라웠고, 그는 누군가의 패이스북 프로필 중 특히 학벌을 눈여겨 보는 사람이려니 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페친 신청을 하면 프로필보다는 '함께 아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그다음에 인식한다. 솔직히 몰라도 그만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선택적으로' 드러내며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전시하는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페이스북 프로필에 무엇을 적었든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를 판단해도 좋을 근거로 삼기에 충분하지는 않다. 물론 ‘선택적으로’ 드러내기에 그 사람의 선택이 곧 ‘가치관’으로 연결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타당하다. 그러나 그 ‘선택’의 근거도 무수한 경우의 수를 가진다. 이를테면, 나는 프로필에 나의 이력을 다 지우고 거주 공간을 코펜하겐으로 입력했다. 누군가 이를 보고 ‘있어 보이게 하려는 북유럽 병 환자’로 단정 지었다 치자. 그 판단은 옳은가, 틀린가?


당신은 상대방의 '무엇'을 보는가?

우리 사무실 구성원은 세 명인데 그중 두 명이 서울대 공대 출신이다. 한 명은 페이스북 프로필에 학력을 입력했고, 한 명은 입력을 안 했다. 이 논란이 일자 문득 궁금해져서 그 이유를 물어봤다. 한 명은 그냥, 다른 한 명은 귀찮아서… 라고 대답했다. 즉, 페이스북 프로필에 학력을 기재하는/하지 않는 이유도 무수히 많다. 기재한 사람을 모두 ‘학벌주의’에 동조하거나, 그것으로 상대를 판단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문제 삼는 본인 스스로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자백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 글을 쓴 사람은 굉장히 어리석은 방법으로 ‘학벌주의’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방구차’처럼 잡히지 않는 논란만 뭉게뭉게 일으켜버렸다. 누군가 그를 향해 “당신은 페이스북 프로필 하나로 상대를 쉽게 판단해 버리는 파쇼군요!”라고 말한다면 뭐라 할 텐가. 그래도 자신이 옳았다며 정신승리할 테지.


학력, 학벌, 학벌주의에 대해 나도 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지잡대’로 분류되는 학교 출신이고, 나를 아끼는 선배들은 나에게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력 세탁’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예전에 기고했던 칼럼 제목이 “삼류 똥통 학교 다니는 주제에”였는데, 이 말은 명문대 다니던 내 동생이 나에게 한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학벌로 나를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이름을 굳이 말하거나(내 동생), 애써 말하지 않음으로써(나) 구별은 하셨다. 솔직히 페이스북 학력란에 출신 학교를 기재하지 않은 이유는, 쫄려서였을 것이다.


이런 내 주변에는 서울대를 비롯하여 명문대 출신들이 많다. 그들과 함께 일을 하며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첫째, 학력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솔직히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일도 잘 하더라. 꽁으로 명문대 들어간 것도 아니니 이건 쉽게 인정되었다. 다만, 그들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둘째, 학력의 차이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학력이 좋은 사람이 일도 잘할 확률이 높겠지만, 학력과 일은 그야말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실, 처음에 '학력'을 누구보다 의식하며 기가 죽거나, 우월감을 느꼈던 건, 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솔직히 그랬다. 그런데 일하다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학력은 그야말로 포장지여서 당장에는 좋아보이지만 결국 내용이 중요하다. 사회에서 내용이란 결국, 성실과 능력이다. 이 '능력'의 의미도 일에 따라 다 다르다(그렇다면 나는 능력주의인가?) 셋째, 학벌은 인간 사회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학벌이란, 문자 그대로 출신 학교에 따라 정해지는 사회적 등급이나 지위, 그것을 형성하는 파벌인데 이것은 어디에서든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비교적 ‘중립적’으로 인식하는 편이다. 다니던 학교, 근무하는 곳에 따라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능력치’에 따라 지위가 나눠지는 것은 동물 세계나 인간 세계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 관계망에서 한걸음 비껴 서 있는 나 같은 ‘듣보’는 종종 외로워지지만, 관계망이란 생물체와 같아서 나는 내 나름의 관계망을 형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나온 사람은 서울대 출신만 사귀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학벌주의다.

우리는 출신 학교나 소속을 중요하게 여기며 다른 것보다 우선하는 태도를 학벌주의라 부른다. 우리 사회는 ‘학벌주의 공화국’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폐해가 깊다. 아마 그 글을 쓴 사람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에 저항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엉뚱한 곳을 공격했다. 페이스북에 학력을 기재하는 것과 기재하지 않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학벌’을 의식하고, ‘학벌주의’에 노출되어 있을까?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 사실, 기재하는 사람은 기재하는 것에 큰 의미를 안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여 안/못 쓰거나, 그것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사람은 다르다. 이른바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편협한 통찰이지만, 나는 소위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학벌, 학벌주의에 더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하여 공부를 제대로 못한 부모가 자식은 명문대를 진학하길 바라며 재수, 3수, 4수를 시킨 달지, 지방대 출신이 학력 세탁을 위해 편입을 하거나 대학원을 통해 업그레이드를 시킨 달지, 지인 중 명문대 출신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급이 올라간다고 여긴 달지, 수시충이니 편입충이라는 말로 굳이 서로를 구분짓는 달지… 이런 일련의 흐름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학번’이라는 것을 가진 자들의 사치일 뿐이다.     

몇 학번이세요?

나는 솔직히 페이스북에 학력을 기재하는 것보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 생각한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불쑥 던지는 질문은, 우리를 학벌주의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로 만든다. 이전 직장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분이었다. 그분이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학교 안 나왔는데요.” 대답을 하면 상대방이 난처해하던 풍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언젠가 페이스북 프로필에 “출신학교와 학번을 기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입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지금도 많다). 사실, 나도 그렇게 했다. 뭔가 있어 보이니까. 내 출신학교를 감추면서도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엄기호 쌤 강의를 듣는데 엄쌤이 그랬다. “사실 그 프로필은 ‘나는 대학을 나온 사람입니다’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한 것이며 그것 또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원리다” 머리가 띵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나 또한 누군가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싶었구나, 싶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는 우리 사회가 개별적 존재들에게 지극히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기에 학벌주의든 뭐든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학벌주의에서 범위를 넓혀본다면, 나이주의, 젠더주의, 외모주의 등 차별하고 배제할 방법들이 널려있다. 상대를 파악할 때 고작 출신학교, 나이, 성별, 외모만 가지고 알파고가 데이터 입력하여 대응하듯 파악하려고 하니, 자랑할게 출신학교나 다니는 직장밖에 없는 것이고, 남들이 부러워 하는 대학엘 갔어도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살거나, 나보다 낮은 점수의 대학 출신을 차별하며 사는 것이다. 회사 입사할 때 출신 학교를 보지 않고도 좋은 사람을 뽑을 수 있고, 성별이나 나이 제한을 두지 않고도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기 가질 수 있는 사회라면, 페이스북에 출신학교를 뭐라 쓰든 뭐가 문제가 되겠나.


아무튼, 여전히 출신 학교를 굳이 밝히지 않음으로써 열심히 학벌주의의 피해자이자, (원하지 않게) 동조자로 살고 있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존재 자체로 서로를 귀하여 여겼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OOO는 절대 그럴 사람 아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