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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Aug 16. 2016

태초의 침묵

그날도 무척 더웠어. 뉴스에서는 ‘전 세계적 폭염’이라 떠들어대며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보편성과 공평함을 설명하려 했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어. 더위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끈적하게 들러붙지. 세계 어디 나라까지 가지 않더라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아도 누구는 추워서 이불을 덮고 자고, 누구는 커다란 냄비에서 서서히 달궈지고 있는데 ‘전 세계적 폭염?’ 세상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아.


꽤 오래 잠을 못 이루다 겨우 옅은 잠이 든 것 같아. 선풍기를 가장 세게 틀어놓고, 배에 여름 이불을 걸치고 자는데 내 방 창문으로 무언가 스멀스멀 넘어오는 느낌이 났어. 바람인가? 잠깐 생각했어. 그런데 검은 것이 슬그머니, 내 침대로 기어 오는 거야. 며칠 사이 늘어난 날벌레인가? 가끔 그럴 때 있잖아. 눈을 감고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상상 속에서는 거대해지는 느낌.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날 발레가 그렇게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잠결에 생각했어. 눈을 뜨고 확인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기 싫었어. 무서우니까.


느릿하게 움직이던 그 검은 것이 순식간에 침대로 뛰어오르는 순간, 침대가 출렁였어. 싸구려 침대여서인지 꽤 크게 출렁이더라. 눈을 뜰 새도 없이 그 검은 것이 내 위에 올라탔어. 팔다리를 쫙 펴고 자던 내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올라탄 그 검은 것은, 이상하게도 내 입을 틀어막지 않더라. 그저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팔만 단호하게 붙들었어. 더 이상하게도 나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어. 눈을 뜨기도 싫더라. 눈이 마주칠까 봐.


그 검은 것이 버둥거리는 나를 더 세게 누르고 키스를 하려 했어. 나는 피하지도 못했어. 버둥거리기도 포기했어. 꿈이란 걸 깨달았거든. 냄새가 나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눈을 떠야겠다 생각했어. 입술과 입술이 닿기 전에 눈을 뜰까, 내 가슴과 허벅지에 촉감이 느껴지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눈을 뜰까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눈을 떠버렸어. 검은 것도, 몸을 누르던 깊은 무게도 허무하게 사라지더니 몸이 금세 추워지더라. '전 세계적 폭염'은 개뿔.


언제부터였을까. 말을 못 하게 된 것. 태초부터였을까?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 하와를 빚으실 때 입을 안 뚫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내 입을 틀어막은 걸까? 태초 이전의 태초, 검은 것 뒤의 검은 것.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어. 말을 잘근잘근 썰어 씹어먹었지. 그제야 아빠는 주먹을 풀고 엄마는 눈물을 마시며 트림을 하더라. 나는 그렇게 침묵의 아이로 심겨졌어.

중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이었어. 신도림에 있는 학원을 다녔지. 키가 지금보다 더 땅과 가까웠을 때 하필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다녔어. 나는 늘 앞이 안 보일 정도의 사람 무덤에 갇혔다가 세 개의 역이 지난 후 부활하곤 했어. 그날도 그랬어. 떠밀리지 않으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누군가에게 기댔는데 내 몸에 이상한 것이 쓰윽 들어왔어. 정확하게는 다리와 다리 사이로. 그땐 꿈이 아니었어. 냄새가 났거든. 뜨거운 냄새. 소리를 지르는 대신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 깨어보니 신도림역 플랫폼 벤치였어. 그때 나는 왜 소리를 지르지 못했을까?


또 한 번은 버스에서 그랬어. 사람이 많은 시외버스였어. 좁은 통로에 간신히 몸을 세웠는데 어느 순간, 뒤쪽에서 또 냄새가 나더라. 딱딱한 냄새. 신경이 엉덩이로 빠르게 모여서 냄새의 원인을 찾아냈어. 어떤 새끼가 비릿하게 웃더라. 슬그머니 옆으로 옮겼어. 따라오더라. "저리 가! 이 변태 새끼야!" 외치고 싶었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더라.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울었어. 끝내 나오지 못한 말이 나를 때렸나 봐. 며칠 아프더라.


그 냄새들은 늘 내 입을 막지 않았어. 다른 구멍을 막았지. 입을 막지 않아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것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말을 찾지 못하니 글자들이 쓰윽, 쓱 지워지더라. 그 자리엔 검은 것들, 냄새들이 단단하게 들어섰지. 나는 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까?


밤의 세계가 오면 다시 꿈을 꾸겠지. 검은 것이 나를 덮치면 내 입은 말하는 대신, 날카로운 입술을 받아들일지도 몰라. 그래야 겨우, 살 수 있을 테니까. 입술을 깨물어 버리면 나는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을까? 눈을 떠버리면 말을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밤이 오려해. 그리고 아침이 오겠지. 입이 열리는 아침을 맞이했으면 해. 나도,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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