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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Aug 16. 2016

전학 온 애

겨울이 왜 좋아요?

좋아하고 싫어하는 계절을 이야기하다가 겨울이 좋다는 내게 그는 호기심 안테나를 세웠다.

 따뜻해서요. 겨울은 따뜻해서 좋고, 봄은 추워서 싫어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그는 허탈한 듯 웃었다. "아니 도대체 봄은 왜 추워요?"


이제 막 초등학교 4학년을 앞둔 나에게 엄마는 조금 멀리 이사를 가야 해서 곧 전학가게 될 것이라 말했다. 결혼을 약속한 조길상과 다른 반으로 배정될까 봐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기약하기 힘든 이별을 걱정해야 했다. 떠날 것을 예정하고 맞이한 새 학년. 친해져 봤자 곧 헤어질 사이니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이제는 다른 반이 된 조길상이 우리 반으로 찾아와 점심을 먹었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니 어색해졌다. 3월 한 달을 어떻게 지냈는지 그 무렵에 관한 기억이 내겐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조길상과의 마지막 만남조차도.


서울 서북쪽 끝에서 서남쪽 끝으로 이사하고 '진짜' 새 학기를 맞이했다. 3월 말이었던가. 춥다고 하기엔 늦고, 덥다고 하기엔 이른 날이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전학 절차를 밟고 담임이 될 선생님과 처음 만났다. 마른 체형에 큰 키, 대머리 아저씨였다. "가가멜이다!"


물론 속으로 외쳤다. 가가멜 뒤를 따라 교실에 들어섰다. 소란과 침묵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어색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뒷자리 어딘가 자리에 배정을 받았다. 3월 말 교실 공기는 차갑지는 않았지만 살갑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전학 온 애'를 향한 호기심을 잠시 정차시킬 뿐 곧바로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로 시선을 옮겨 재잘거렸다. 3월 말의 교실은 '전학 온 애'에겐 꽤 난감한 공간이었다.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아이들은 나에게 틈을 주지 않았고, 한걸음 늦게 도착한 나는  굳이 그들 틈에 끼지 않는 것으로 이전 학교에 남겨두고 온 친구들을 향한 애틋함을 지키며 원하지 않았던 변화에 저항했다. 그 무렵 나는 아무도 살지 않아 풀만 무성한 고립된 섬 같았다. 하지 못한 말들이 잡초처럼 자라 나를 더 고립시켰다.

그럭저럭 일주일이 지나고 오래 기억에 남을 미술시간을 맞이했다. 준비물이 있었는지 아이들은 책상 위에 주섬주섬 뭔가를 올려놓았다. 뭘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던 내 책상과 준비물을 깜빡한 서너 명의 아이들 책상은 텅 빈 채로 수업 종이 울렸다. 가가멜이 들어와 교실을 둘러보더니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준비물 안 가져온 놈들 다 나와!" 쭈뼛쭈뼛 일어나 나갔다. "너희 다 주먹 쥐고 엎드려뻗쳐!"


함께 나간 아이들 맨 끝에 서있다가 "빨리!"라는 재촉을 듣고 작은 주먹에 체중을 실어 엎드렸다. 나무로 만든 교실 바닥이 차갑고 딱딱했다. 가가멜은 그제야 수업을 시작했다. 팔은 부들부들 떨려오고, 얼굴로 피가 쏠렸다. 억울함도 함께 쏠렸다. "전학 와서 준비물을 몰랐어요." 한마디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눈물은 흐르는데 주먹을 펼 수 없어 닦지도 못 했다. 그것도 잠시, 버티던 팔이 휘청이더니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소리에 놀란 가가멜이 더 큰 소리로 놀라게 하였다. "일어나!"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쟤 전학 왔는데요.

그제야 나를 알아본 가가멜은 여전히 완고한,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말을 하지 그랬어. 들어가 봐.


울면 또 혼날까 봐 꾹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끝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은 낯선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꽤 오래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 아이들에게 늘 '전학 온 애'였고, 여전히 혼자였다. 하필이면 집도 다른 아이들과는 정반대 방향이어서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그 무렵 내가 개발한 놀이가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늘 나라 공주의 모험'이었다. 줄거리는 이랬다. 원래 나는 그늘 나라 공주인데 가가멜이라는 괴물에게 잡혀있다 겨우 탈출했다. 그늘 나라 사람이었기에 괴물이 사는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가려면 그늘로만 다녀야 했다. 햇빛 구역으로 나가면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늘 구역이 오래 안 나타날 경우 딱 한 번 숨을 쉴 수 있었다. 한동안 그 놀이에 흠뻑 빠져 항상 그늘을 찾아 담벼락 아래로 살금살금(공주니까) 다녔고, 햇빛이 비치는 곳에선 숨을 꾹 참고 힘껏 달렸다. 그 풍경을 누가 봤다면 "우리 동네에 이상한 어린 여자 애가 돌아다닌다" 소문이 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늘 나라 공주는 정체를 들키지 않고 매일 무시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반 아이 누구는 전학 온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도 차가워 보여서 그러질 못했다고 한다. 내가 오히려 '그늘 나라'에 갇혔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봄이 왜 춥냐는 그의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그냥. 그랬어요.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유난히 적응하기 힘들어했어요. 다들 햇빛에 있는데 나만 그늘에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는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다는 말간 얼굴로 나를 봤고, 나는 봄이 좋고 겨울이 싫다는 그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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