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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Sep 13. 2016

<다음 침공은 어디?>와 페미니즘

영화

이번 호 <주간 경향> 특집은 '헬조선시대 페미니즘'이다. 대부분 시사주간지는 명절 때 합본호를 발행한다. 가족/친척들이 모이면 주로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시사, 정치 이야기를 하게 되는 법이라, 주로 묵직한 정치/사회를 특집으로 싣는다. 참고로 <시사인> 이번 합본호 특집은 '한국 사회 신뢰도 조사’다. 창간 9주년 특집호이기도 하다. 표지 사진은 문재인과 반기문이다. 그런 흐름을 이해하고 보자면, <주간경향>의 이번 특집 선택은 매우 의미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정치 혹은 정책, 사회 담론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뜨거운 고구마' 페미니즘

지난 주말 경향신문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는 그중 하나의 기사를 공유했다. ‘페미니즘 없이 저출산 해결 없다’는 제목의 기사(종이책 제목은 '바로 이 순간 ‘페미니즘’이 등장하는 이유는'이다)는 '엄마'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페미니즘과 저출산 대책을 연결 지었다. 요즘 ‘페미니즘’의 ‘페’자만 나와도 격한 댓글들이 달리는데 이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판의 내용은 첫 번째로 언급된 기사의 부제목(엄마가 ‘맘충’으로 불리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이자 사례로 나온 ‘맘충’에 관한 비판이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비판 댓글의 주요 방향은 이랬다. “누가 모든 애 엄마를 맘충으로 부르냐, 그럴만한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부르는 거지.” 일단 기사 맥락에 관한 오독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떤 대상을, 특히 여성을 너무 쉽게 ‘~녀’ 혹은 ‘맘충’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인식은 결여되어 있다. 댓글 읽는데 고구마를 100개는 욱여넣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고구마 먹은 느낌’ 많이 받다 보면 실제로 고구마 판매율이 낮아지지 않을까?”라는 쓸데없는 걱정이 밀려올 지경이다.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문제는 “페미니즘이 필요한 게 아니라 국가 정책이 문제인 것입니다”라는 그럴듯한 언설이다. 이건 이른바 “뭣이 중헌디!” 정도의 논리인데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페미니즘’을 거론하는 것을 “파도가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는” 한가한 생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많으니까.

밀리고, 밀리고, 밀리는 페미니즘

어떤 ‘정책’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예를 들어 “철학 없이 저출산 해결 없다”라거나, “교육 없이 저출산 해결 없다”라거나, “정치 없이 저출산 해결 없다”라고 했을 때 거부감이 드는가? 아마 끄덕끄덕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페미니즘’은 그런 해결책으로서 고려 사항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출산과 육아를 감당하는 대부분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페미니즘이 중요한 게 아니고!”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설마 지금까지 그 모든 영역에 ‘여성’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 <주간경향> 기사를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들리고 있는 목소리다.

소위 ‘메갈’이나 ‘워마드’가 페미니즘의 전부가 아니듯, 페미니즘은 단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일 수 있고, 학문일 수 있고, 라이프스타일일 수 있고, 무엇보다… 정책/정치의 영역에서도 제 몫을 해야 하는 마땅한 주체다.  그런 페미니즘을 정책과 연결 짓는 것, 예를 들면 ‘페미니즘 없이 저출산 대책 없다’는 말이 강경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주된 인물은 ‘남성’이다. 그러나 출산/양육을 주로 담당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여성이다. 이런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해 여성이 제대로 그 권리이자 의무를 수행하도록 사회 인식과 정책은 충분하게 고려하고 있는지 고민하며 문제 제기하는 것이 맞지 않나? 이것이 바로 사회적 균형 아닌가? 이런 상식적인 기사에도 동의를 못 한다면 그들이 외치는 사회 정의니, 진보니, ‘여성을 위한다는’ 말들은 다 뭐란 말인가? 그렇게 사회 한 축인 여성의 귄리, 출산/양육 정책의 당사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입장은 밀리고, 밀리고, 밀리는 것이다.

이건 명백하게 ‘배움’과 '상상'의 문제란 생각이 든다. 배워야 알고, 아는 만큼 상상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완고하게 안 하려니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상상한 만큼 성장하기 마련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관해 잘 모르는데 그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군”이라고 인정하면 병에 걸린다는 계시라도 받은 것일까?

물론 경제가 악화하니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한 남성들이 ‘우리도 피해자인데…’라고 생각한다는 것… 안다. 그리고 그런 ‘악화’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도 인식한다. 하지만 나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피해자’ 의식만으로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실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지향’을 가질 때 의식이든, 정책이든 고민할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이 그 사회적 상상력이 가능하도록 유효한 물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이클 무어의 <다음 침공은 어디?>에 나온 국가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알고보면 페미니즘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더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각 나라에 침공하여 좋은 점을 가져온다는 설정으로 유럽과 아프리카의 9개국의 좋은 제도를 소개한다. 그 국가들은 각기 다른 좋은 장점을 가졌지만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애 낳고 키우며 살기 좋은’ 정책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걸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영화에서는 ‘섹스하기 좋은 나라’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8주 유급 휴가, 13월의 급여 정책을 소개하며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8주 휴가 동안 섹스해서 아기를 낳는 거구나” 이 말이 ‘페미니즘’과 뭔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 낳기를 원할 경우, 아이를 낳고 육아하기에 최상의 정책을 펼치도록 고민하며 구현하는 것 자체가 국가의 의무이고,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은 ‘페미니즘’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당연히 ‘남성’에게도 좋은 정책이다. 조금 더 들여다본다면,

튀니지는 재스민 혁명을 통해 독재자를 몰아내며 민주주의의 근간이 될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 헌법에는 ‘남녀평등’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조차 헌법에 남녀평등 항목을 넣기 전부터 무료 여성 보건소가 운영되고, 70년대 후반부터는 낙태가 합법이었다고 한다. 의회의 잘반은 여성이다. 튀니지 헌법에 명시된 ‘남녀평등’ 조항은 이렇다.


“국가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화 및 신장하는 데 힘쓴다. 국가는 모든 직책과 모든 분야에서 남녀의 기회균등을 보장해야 한다. 국가는 선출직에서 남녀 동수 의원단을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국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근절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아이슬란드는 더하다. 그 나라는 세계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다. 의회나 이사회도 여성 비율이 남성과 균등하도록 정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금융 대란 때 “여성이 CEO인 금융 기관만 망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왔으며 기업을 못한 CEO를 법정에 세워 ‘멀고, 멀고, 멀고,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기업에 위기가 발생하면 너무 당연하게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그중 가장 약한 고리인 여성 노동자를 먼저 치지만 CEO를 비롯한 고위직은 아무 타격을 받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다. 마이클 무어는 이 두 나라를 소개하며 “성평등 수준이 높은 국가는 남녀 모두 행복해 보였다”라고 평가한다.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영화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세계에서 성평등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스웨덴의 사민당 청년위원회(SSU) 강령에는 '페미니즘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조항이 있다. 독일 사민당 강령에는 '양성평등' 조항이 있다.

이 나라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겠나?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에는 당연히 공론화-투쟁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 사회는 그 과정을 통해 결국 진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론장'이지, 낙인과 단두대가 아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면, 물론 이 두 나라의 예가 못 마땅할 수 있다(함께 이 영화를 본 지인은 두 나라 사례가 나올 때 남성들이 콧방귀를 뀌거나 헛기침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과 안 배우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사회는 ‘페미니즘’을 통과하지 않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출산 정책도 그렇고 유리천장 등 엄연하게 존재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배운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무시하거나 싸울 것인가?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조금 더 '페미니즘' 가까이 다가왔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은 과연 이 사회의 '피해자'인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 여성에게만 좋은 것인가? 아니다. 영화에서 제시된 예에서 보듯,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실 '남성 vs 여성'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정책, 불평등, 계급사회, 자본주의 등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여성이 아이를 돌보느라 일찍 퇴근하면 그만큼 남성이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육아를 담당하도록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어떨까? 이런 전환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난한 싸움을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싸우는 것? OK. 그래야 '다른 세계'를 만나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1. 다 안다고, 이것이 정답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모르는 것과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솔직하게 구분하고 인정하자.
2. 상대를 가르치는 대상이나, 적대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대화 상대로 인정하자.
3. ‘이것보다 저것이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여기지 말자. 그런 판단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었지, 결코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는 사회가 더 건강한 것이다.
4. 페미니즘 창궐한다고 당신들 안 죽는다. 안심하라.


더 가까이 오라. 페미니즘이 당신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지켜보라. 더 가까이 오라. 와서 페미니즘 운동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직접 살펴보라. 더 가까이 오라. 그러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덧. 다시 <주간경향> 특집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제목이 왜 '페미니즘'이 아니라 '헬조선시대 페미니즘'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대한민국을 가르키는 '헬조선'에서 '헬'이라는 단어 뒤에 왜 '조선'이라는 근대가 호명되어야 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헬조선'이 동시대 (남성)청년의 공간이라면, '헬조선시대 페미니즘'은 그 '헬조선'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과 지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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