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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모레비 Aug 26. 2020

나는 왜 발표가 그토록 힘들었을까

노잼이 오답인 세상, 소통하며 말하기




분명 떨지 않고 발표를 했는데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발표, 건배사 등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생길 때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유는 예측하기 어려운 청중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입을 굳게 닫고 무서운 맹수로 돌변할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겨줄지 예상하기 어려웠고, 그 어두운 공간에 마치 주사위를 던져 6이 나오길 기도하듯 그저 거친 호흡으로 무작정 말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고, 반응이 그럭저럭 괜찮을 때는 '이번에도 잘 넘겼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앞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 참으로 많다. 회식 자리, 프로젝트 보고, 심지어 내 자식의 돌잔치에서도 먼길을 와주신 일가 친척분들 앞에서 부모로서 멋지게 소감을 전해야만 한다. 청중 앞에 수백 번 서본 전문 연사가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들에겐 누군가의 앞에서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내가 교육 담당자를 직업으로 삼게 되면서 적게는 10명 많게는 100명 이상의 참가자들 앞에서도 떨지 않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런 경험을 미루어 볼 때 떨지 않고 말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반복으로도 어느 정도 습득이 가능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떨림에서 해방이 됐다고 끝은 아니었다. 마이크를 내려놓았을 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바로 나 혼자 신나게 떠들고 내려왔을 때였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들 앞에서 그저 입만 그럴싸하게 뻥긋거리는 감정 없는 로봇에 불과했다. 충분히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한 영역인 것이다.


 제대로 된 발표(소통)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뇌과학 기반의 학습 원리를 살펴보니 핵심은 나와 상대방의 연결, 즉 공감이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질문이 'Why'라고 한다.


 청중의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왜?'라는 질문에 충분히 답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즉시 귀를 닫고, 마음의 문도 열지 않는다. 얼마나 떨지 않고 말하느냐,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냐와는 관계없이 그렇게 상대방과 나는 단절되어 버린다.




왜 ‘공감’으로 시작해야 할까?


 왜 공감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까? 리더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진행했던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직원분들 입장에서 고역이다. 법정필수교육이기에 매해 반복될 수밖에 없고, 콘텐츠 역시 항상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자연스레 강의장은 흔한 예비군 훈련장의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다. 참가자들은 교육이 시작하기도 전에 '또 무슨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려나'라는 눈빛으로 하품을 시작한다.


 사내에서 리더분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교육에 더해 오프라인 강의를 추가로 진행하자는 결정이 내려졌었다. 사실 조직 내에서 리더의 위치가 갖는 중요성과 영향력 때문이었으나 몇몇 리더분들은 우리가 잠재적 성범죄자라도 되는 것이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해는 됐다. 조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에게 이미 온라인으로 들은 교육을 또 들으라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설상가상 첫 해에 모셨던 강사님은 "대개 성희롱 이슈는 리더들의 부주의가 원인이다."라는 실언을 해 리더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다음 해에도 리더분들을 대상으로 예방교육을 진행해야만 했다. 사실 앞선 히스토리를 듣고, 누구라도 손사래를 칠만한 강의 자리였으나 팀장님은 용기 있게 강의를 수락하셨다.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로 강의의 포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바쁘신 중에도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교육을 진행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자동차 사고가 날뻔했거든요. 집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대기하는데 갑작스레 끼어든 차량 때문에 3중 추돌이 … (중략)

교육이 취소됐다면 더 좋아하셨으려나요..?
(웃음)

 이 자리에 계신 리더분들도 자동차 사고 한 번쯤 경험해보시지 않았나요? 생각해보니 자동차 사고는 성희롱 사고와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찾아오고, 한번 발생하면 큰 손실이 발생하고, 여러 후유증까지 남게 되니까요.

 바쁜 리더분들을 이 자리에 어렵게 모신 건 한 분 한 분이 조직을 관리하시는 데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리더분들이 먼저 앞장서서 조직을 위해 안전운전/방어운전을 해주실 때 우리 조직은 좀 더 건강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팀장님이 원론적인 성희롱 예방교육의 목적을 이야기했다면 참가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또 작년의 실패 사례처럼 리더들에게 대부분 책임(?)이 있기에 교육을 재차 진행한다는 오해를 줬다면?


 1년전 외부 강사의 강의와 달리 팀장님의 오프닝에는 듣는 사람에 대한 공감, 공통된 경험의 연결, 유머가 함께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살얼음판 같았던 교육장 분위기는 훈기로 가득한 채 마무리됐다.

 

 



이야기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에펠탑을 짓는 거래요.



 하버드의 뇌과학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쓰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에서는 '이야기'의 효과를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속에
랜드마크를 짓는 행위다.



 우리는 특정 장소를 떠올리며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강남역 8번 출구, 교보문고 혹은 명동성당과 같이 말이다. 이야기는 이정표가 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기억은 장소, 냄새 등 강렬한 자극과 함께 연상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학습원리를 연구한 4MAT 학습법에서는 학습의 첫 단계를 WHY라고 얘기한다. Why라는 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결과 집중이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만한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며, 더 나아가 각자의 경험까지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발표의 원리도 같다. 먼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해 상대방의 마음속에 하나의 랜드마크를 찍는다. 이 랜드마크를 통해 함께 있는 이유에 공감하게 하고, 그 랜드마크를 매개체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풀어나가야 한다.




듣는 이와 연결되는 순간,

우리의 발표는 성공한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기회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연결'을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내 발표의 청자는 누구인가? 그들과 내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혹은 소재'는 무엇인가? 그 이야깃거리의 핵심 내용과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일맥상통하는가?

 

 코로나 상황에서 승진이 어려울 것만 같았던 시기에 갑작스런 승진 소식을 듣고, 마음을 전한 선배님의 소감을 기억한다.


 선배는 무미건조하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덕분에'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주위를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 분들에게 진심을 꾹꾹 담아 "선후배님들 덕분에 승진 소식을 듣게 된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어려운 시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공감하기 좋은 적절한 오프닝이었다.


 듣는 사람과의 연결이 없다면 우리의 발표시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으로 변해버릴지 모른다.




<참고 도서>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 제레드 쿠니 호바스 저

『4MAT 강의법』, 버니스 매카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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