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위해 빼지 말고 먼저 더해봐!
진짜 혁신하고 싶어?
빼지 말고 먼저 더해봐
최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한 컨설팅 업체의 대표님과 미팅을 하다가 흥미로운 사례를 전해 들었다. 워크 피트니스라는 컨셉으로 매번 조직의 일하는 체질 변화를 컨설팅하고 있는데, 실행 전략을 바꿔보니 먹혀들더라는 것이었다. 대표님은 그 전략의 이름을 ‘배스킨라빈스 31’이라 불렀다.
*좋은 아이디어를 공유해주신 피플앤비즈니스 대표님 감사합니다. :)
워크 피트니스는 운동의 개념을 일에 적용한다. 건강한 몸을 만든다는 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불필요한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줄이는 다이어트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근력과 기초 대사량을 늘리는 피트니스다. 일도 운동과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업무들은 과감하게 다이어트해서 줄여야 한다. 그래야 실무자들의 무력감과 피로감이 줄어든다. 또, 같은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해 일하는 방식, 소통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게 일을 잘하기 위한 근력이다.
대표님 말에 따르면 컨설팅 초기에는 다이어트 후에 벌크업하는 순서로 접근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이어트 후에 근력을 늘려보려고 해도 도무지 안 늘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다이어트를 가열차게 하며 조직은 이미 갖고 있던 힘을 많이 소진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변화를 지속성 있게 시도하려면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다. 먼저 근력 운동을 해서 기초체력을 키워두는 것이 필요했다.
정리 컨설턴트도 말하지 않던가? 당신이 원하는 변화를 위해 일단 쓸데없는 물건들을 버리라고 말이다. 변화와 혁신을 위한 전략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개념이 ERRC가 아닐까 싶다. Eliminate, Reduce, Raise, Create의 앞글자를 딴 ERRC라는 프레임은 일단 혁신하기 위해서는 제거할 건 제거하고, 줄일 건 줄여야 새로운 혁신의 공간과 에너지가 생긴다는 개념이다.
이 접근법을 처음 접했을 때, 머리를 탁 치며 공감했다. 사실 담당 업무를 개선할 때에도 후배들과 이 프레임으로 함께 고민하며 좋은 효과를 봤었다. 소위 말해 짜치는 운영성 반복 업무를 줄이기 위한 논의를 먼저 하게 되니 선배로서의 면도 살았다. 또, 이런 효율화와 간소화 절차 후에 혁신이라는 부담스러운 주제를 회의 테이블 위에 꺼내놓는 것에도 한결 부담이 덜했다. 이런 경험 탓인지 나는 변화관리를 위한 순서는 ‘먼저 뺀 후에 더하기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표님이 소개해준 방식은 거꾸로였다. 이른바 CRRE.
Creat!
무엇을 제거할지 줄일지 고민하기에 앞서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를 먼저 찾자는 것이다. 매번 무엇을 혁신할지도 모른 채로 다짜고짜 제거하고,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다 보니 막상 줄여놓았을 때 무엇이 중요하게 추가되어야 하는지, 혁신할 것인지 영역 설정부터 애를 먹더라는 것이다.
리더의 결연한 의지 없이 조직에서 미니멀리즘은 통하지 않는 법이다. 적어도 일에 관해서는 말이다. 무언가가 비워지면 자꾸 빈 공간을 채우고 더하려고 하는 것이 성과를 추구하는 조직의 특성이기도 하다. 뺄셈부터 시작하면 자꾸 무엇이든 채워 넣으려는 본능도 강화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기껏 시작한 혁신을 위한 여정이 변화를 위한 변화로 찝찝하게 마무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아이스크림가게 사장님이 혁신적인 아이템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다. 고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꿀맛 아이템 2개 정도만 개발하면 월 매출이 최소 500만원은 증가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장님은 31개의 아이스크림 중 가장 매출이 낮은 아이스크림 2개를 노려본다. 그리고 큰 맘먹고 그 2개를 일단 매대에서 뺀다. 그리고 무슨 아이스크림을 채워 넣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이스크림 2개를 뺀 순간부터 사장님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2가지 종류나 더 팔 수 있는데 이미 자리를 빼버려서 고객들의 구매 기회는 줄어들었고, 매출에도 영향을 줄 것 같다. 공장장은 공장이 쉼 없이 돌아갈 때 가장 흐뭇한 법인데, 31개의 공간에 29개의 아이스크림만 채워져 있는 꼴을 도저히 눈뜨고 견디기 힘들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 않았나? 손님들한테 2개라도 선택권을 더 주면 어찌 됐든 그들도 우리도 좋은 거 아닌가?
매대에서 빠진 2개 아이스크림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그 친구들이 아무리 안 팔려도 하루에 한두 개쯤은 팔리긴 팔렸으니 말이다. 매니아틱한 소수의 취향도 무시하는 것 같고, 영 마음이 불편하다. 급기야 매출도 감소한다. 아주 미세한 수치지만 일단 줄어들었으니 위기의식은 커져만 간다. 결국 훌륭한 아이스크림을 만들겠다는 사장님의 원대한 포부는 비즈니스의 논리와 시급성, 조급함에 밀려 다시 평범한 아이스크림들로 급히 채워진다.
고객 입장에서 이 아이스크림 가게를 방문했을 때 어떤 변화를 느낄 수 있을까? 변화를 시도했으나 그곳에 혁신이란 없었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미한 혁신이었던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를 방문했을 때 ‘라멘 스타디움’이라는 재밌는 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에는 10여 개의 라멘 업체들이 입점해있었고, 어떤 기준에 의해 가장 하위권으로 랭크된 업체는 퇴출된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라멘 가게가 들어오는 시스템이다.
설명만 들어보면 굉장히 이상적인 형태인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10개 업체가 모두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기란 어렵다. 이 공간을 운영하는 경영자 입장에서는 하위권에 랭크된 가게를 퇴출시키는 때를 대비해, 트렌디하고 매출이 잘 나올법한 라멘 가게와 계약을 미리 해두면 좋겠으나, 당장 물망에 오르는 라멘 가게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가게가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게 최적의 교체 선수가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라멘 스타디움의 빈자리를 채우는 가게는 그저 그런 가게가 될 확률도 당연히 존재하게 된다. 심지어 퇴출된 가게보다 형편없는 가게가 입점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배스킨라빈스 31 전략을 쓰기에는 입점할 수 있는 점포수에 한계가 있다. 추가 공간이 없는데 어찌 좋은 가게를 먼저 입점시키라는 것인가?
이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 팝업스토어 형태가 아닐까? 조금 비좁더라도 라멘 스타디움 중앙 공간을 확보해 작은 푸드트럭을 세워두고, 새로운 라멘 가게를 소개한다. 본래 자리에 위치한 10개 가게 외에도 라멘 스타디움에는 1개의 라멘 가게가 추가로 고객들을 만나는 것이다.
라멘 스타디움 중앙에 들어온 푸드트럭. 이게 바로 애자일의 모습이 아닐까? 작게 시도하고, 작은 공을 먼저 굴려보는 접근방법 말이다.
이미 애자일한 방법으로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영역이 또 있다. 바로 방송국이다. 명절 연휴에 여러 방송국에서는 파일럿 프로그램들을 선보인다. 정규시간에 편성하기엔 제작비 투자의 문제도 있고, 실패하면 위험 부담도 크니 먼저 작게 시도해보고 반응이 좋으면 프로그램을 정규 프로그램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성공한 프로가 여럿이다.
조직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변화도 마찬가지다. 조직의 TO를 더 이상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R&D 역량을 끌어올리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조직이 있다. 이 조직은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까?
먼저 업무를 효율화하는 것, 즉 뺄셈부터 할 것이 아니라 R&D 역량 강화를 위한 이상적인 조직구조와 업무 방식부터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를 실행할 때 작고 실패 비용이 크지 않게 시도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런 애자일한 더하기 과정 이후에 재편성될 조직 구조에 맞춰 운영성 업무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배스킨라빈스 31 전략은 변화를 위해 다짜고짜 개선부터 하지 말고 혁신부터 작고 빠르게 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근력을 키우는 것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몸에 무리를 주면 그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저 작은 성공 경험을 만들어 혁신에 공감하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는 사람들을 늘려가야 한다. 혁신의 시작은 작게 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