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도 존댓말하셨나요?

사물존칭 피하기

by 오은오

엑셀 속 저번 달 판매 데이터를 보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팀원이 고객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업무 대화로 들렸지만, 말의 흐름을 자세히 따라가다 보니 뭔가 어색한 부분이 계속 신경 쓰였다. 마치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 쩝쩝거릴 때처럼 처음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그 말이 계속해서 귀에 남았다.


“표지 파일이랑 원고 파일 올려주시면 되세요.”


처음엔 흘려들었다. 잠시 뒤 다시 들렸다.


“AI를 적극 활용한 도서는 반려되고 있으세요. 도서명이 어떻게 되세요?”



그제야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통화하는 팀원, 그리고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이질감드는 문장

'뭔가 이상한데? 사람이 아닌데 왜 높여 말하지?'


표지 파일, 원고 파일, 도서명. 전부 사람이 아닌데, 말 끝마다 ‘되세요’가 따라붙는다. 팀원 입장에서 고객에게 공손하려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다. 이 태도는 오히려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고객(듣는 사람) 입장에서 전달받는 정보가 모호해진다. 일부러 잘못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고객에게 친절하게 들리기를 바라고, 말끝을 부드럽게 하려는 의도도 이해한다.




사물존칭

‘사물 존칭’은 사람에게 써야 할 높임 표현을 사물이나 절차, 상태 등에 잘못 붙이는 표현을 뜻한다. 사물에 존칭을 붙이는 순간, 공손해 보이려던 말이 오히려 전문성 없는 인상만 남긴다.

대표적인 예시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어요.”
→ 커피가 사람처럼 ‘나오다’에 존칭이 붙은 표현.

“이 티셔츠는 잘 나가세요.”
→ 상품이 잘 팔린다는 말인데, ‘나가다’에 존칭을 붙여 사물을 높임.

“사이즈가 없으세요.”
→ ‘사이즈가 없다’는 상태를 손님이 아닌 ‘사이즈’에 붙여 존칭 처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세요?”
→ 손님에게 확인하는 말인데,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존칭이 붙음.

“결제되셨어요.”
→ 결제라는 절차에 존칭이 붙어서, 마치 결제가 스스로 진행된 것처럼 표현됨.

사물은 사람처럼 느끼거나 반응하지 않는다. 말은 결국 '누가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데, 사물을 높이는 말은 그 균형을 무너뜨린다. 말의 방향이 흐려지고, 전달이 모호해진다. 듣는 사람도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하나, 사물 존칭은 책임의 주체를 흐린다. "도서가 반려되셨습니다"라는 말은 마치 도서가 스스로 판단한 것처럼 들린다. 누가 결정했는지를 감춘 말은 결과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친절해 보이기 위한 표현이 오히려 정확성을 잃게 만들고, 말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사물존칭을 좀 덜 쓰려면

언어 전문가들은 이미 '사물에 존칭을 붙이지 않기', '문장의 주체를 명확히 하기', '불필요한 수동형 표현 줄이기', '간접높임법 해석' 등 다양한 기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러한 전문적인 조언들이 분명 유용하지만, 일상 업무에서 즉시 적용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조금이라도 사물존칭을 덜 쓰게 하는 실용적인 접근법을 고민한 끝에, 팀원에게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했다.



"상대를 편한 지인이라 생각하고 말해 보세요"

누구에게나 어렵고 격식 있게 말하기보다, 친근한 지인에게 말하듯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상대방을 멀게 느끼거나 어렵게 생각할수록 우리는 불필요한 격식과 수식어를 더하게 된다. 반면 가깝고 편안한 사이라고 여길수록 핵심만 담긴 명확한 표현을 쓰게 된다.

"견적서가 준비되셨습니까?"가 아닌 "견적서 준비됐나요?"
"결제가 완료되셨으면 알려주세요."가 아닌 "결제 완료되면 알려주세요."
"프로젝트 일정이 조정되셨는데요."가 아닌 "프로젝트 일정이 변경됐습니다."

이런 표현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불필요한 형식적 존칭을 덜어내니 메시지는 더 간결해지고, 의미는 더 선명해진다. 과도한 언어적 장식을 걷어내면 말의 본질인 '정보 전달'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결코 상대방을 존중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격식으로 인해 사물존칭과 같은 어색한 표현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대화하자는 의미다.




한 대학에서는 흥미로운 시도를 한 사례가 있다. 강의에서는 모두가 '평어'를 썼는데, 이는 서로 이름을 부르고 위계 없이 편하게 대화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이 교수님에게 "오늘 강의 진짜 좋았어" "질문 있어!"라고 말하는 광경은 처음에는 낯설었다. 하지만 곧 불필요한 격식이 사라지고 핵심 내용만 주고받게 되면서 의사소통이 더 명확해졌다.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 메시지는 더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정보 교환도 훨씬 수월해졌다.

(출처: 22학번이랑 '반말 모드'하는 50대 교수의 정체_스브스뉴스)



반말을 쓰자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인지하고 고민하자는 이야기다. 말은 결국 태도고 관계다. 그걸 잊지 않으면, ‘되세요’ 하나쯤 고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과한 존중이 담긴 문장을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보자.


그게 더 나은 말이고, 더 나은 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8일 전국 여행, 여행 경비는 2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