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 도메인 콘텐츠와 AI의 만남
제목에서부터 스포를 했지만...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세지는 만화 캐릭터'를 떠올려보자.
하나. 둘.. 셋...!
대장내시경을 받을 나이인가? 그렇다면 알 것이다. 이 캐릭터는 뽀빠이다. 어릴 적 일요일 아침 9시, 텔레비전 채널 7번에서 봤던 것 같은 아저씨. 별사탕이 들어간 라면땅 과자 이름 같기도 한 제목.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세지는 이 캐릭터는 나를 포함한 그 시절 애들이 좋아했었다. 지금은 '뭐... 외국에서 유명하다니까 디즈니와 비슷한 인지도를 가진 세계적인 캐릭터라겠거니~' 라고 인지하고 있다.
이 캐릭터가 저작권 만료가 됐단다. 즉 퍼블릭 도메인이 된 이 캐릭터.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자유롭게 활용해도 내용증명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 등에도 활용할 수 있고, 상업적으로도 쓸 수 있다.
95년 된 ‘뽀빠이’…캐릭터 사용 자유로워졌다|동아일보
퍼블릭 도메인이란?
아무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그림, 음악, 글 같은 콘텐츠. 예를 들어 구글에서 '저작권 없는 강아지 사진'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도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 중 하나다. (진짜 저작권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주 오래된 작품이나 만든 사람이 "누구나 써도 좋아"라고 한 작품들은 모두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에 속한다.
퍼블릭 도메인 전자책이 급증하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검색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책 제목부터 ~~시리즈, ~~명작, ~~ 읽기를 붙인 책이 100권 넘게 검색된다. 물론 출판사마다 특색 있게 원서를 번역하고 인트로 혹은 아웃트로에 편집자 혹은 번역가의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100% 같은 도서라고 볼 순 없다.
누구나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와 같은 전자책 유통 플랫폼에서 출판해 준다는 장점 때문에 이렇게 많지 않을까 한다.
요즘은 어떤가? 퍼블릭 콘텐츠 + 전자책 유통 플랫폼의 장점에 뭐가 하나 더 붙는다. 바로 AI라는 슈퍼 울트라 고오급 Tool이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 결과 단순히 원고를 복붙하거나 번역해서 출판하는 수준이 아닌 AI를 거쳐 요약하고, 복합적인 프롬프트를 활용해 그럴듯한 인사이트까지 말해주는 수백 권의 고전문학 전자책이 탄생했다.
난리가 났다.
고객이 신간으로 업로드하는 콘텐츠의 절반이 이런 도서다. 우리는 전통 출판사처럼 모든 도서를 정독하며 교정·교열하는 등 많은 공수를 들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든 원고를 속독으로 검토한다.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는 정말 훌륭한 자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도서는 인간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옛날 거리와 저택을 직접 거닐며 당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호흡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도 고전문학을 즐기려고 노력 중이라 책 10권을 읽으면 그중 1권은 고전 문학을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전문학을 일하다 만나게 되면 책이 아닌 데이터로 보인다. 같은 도서를 3명이 한 권씩 올려, 같은 책 3개가 데이터로 쌓인다. 본문 내용은 보진 않고 어떻게 편집했는지, 그리고 편집했던 작가의 생각이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유통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생각이 있긴 있다. 그들이 생각이 아닌 AI 생각이다. 솔직히 짜증 난다.
그들 도서를 한 권 한 권 서점에 업로드 할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도서는 실익이 있을까?', '아니 독자들이 원할까?',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출판해야 할까?', '만약 이 책이 종이책이라면, 서점에서 주변 시야에도 걸리지 않을 법한 이 책들을 어떻게 할까?' 단순히 '한 명만 걸려라'라는 마인드로 몇 고객은 이런 도서를 유통하겠다 하는데... 서점에 올려야 할까?
고민이다.
뭐 다른 출판사 담당자를 아는 것도 아니고 알더라도 사담을 나눌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대표님도 없다. 내 고민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을 거 같은 서점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평소 업무 소통만 했던 터라, 괜스레 미안했다)
"그래서 상황은 이렇습니다… 담당자님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각 서점마다 그들의 방법으로 쌓여가는 퍼블릭 콘텐츠 도서를 관리하고 있었다. '어디는 중복 도서로 관리하고 어디는 일단 지켜보고 있고 어디는 AI로 편집했으니, AI 도서로 보고 있다. 어디는...' 우리만 준비하지 않았다.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단순히 '많은 책'을 유통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치 있는 책'을 선별하는 것인가?
도서 유통의 관점에서 보면,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는 분명 쉽게 얻을 수 있는 출판 재료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로미오와 줄리엣 100종이 나열된 검색 결과 화면에서, 독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그저 운 좋게 눈에 띈 책을 고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표지 디자인을 보고 선택하는 것일까?
담당자로서 이러한 도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퍼블릭 도메인 작품을 다루더라도, 반드시 새로운 가치가 더해져야 한다. 현대적 해석이 담긴 서문,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부록, 혹은 원작과 대화하는 형태의 주석 등이 그것이다. 'AI가 생성한 내용이라도 편집자의 관점과 전문성이 녹아든 큐레이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글 처음에 언급했던 뽀빠이를 다시 떠올려보자.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솟는 이 캐릭터가 이제 퍼블릭 도메인이 되었다. 누구나 뽀빠이를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뽀빠이 콘텐츠가 동일한 가치를 지닐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원작의 정신을 이해하고, 캐릭터의 본질을 존중하며, 새로운 창의성을 더한 작품만이 진정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출판의 본질도 결국 '가치 전달'에 있다고 생각한다.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라는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보물이 있지만, 이를 어떻게 독자에게 전달하느냐가 작가의 진정한 역할일 것이다. 특히 AI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2022년 11월에 Chat gpt가 처음 출시됐다. 3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AI가 무엇이고 이것이 무엇을 만드는지 다 알고 있다. AI로 콘텐츠를 생성한다면, 단순히 '생성'에서 끝나면 안 된다. 충분히 고민하고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내용을 읽고 지우고, 다시 읽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본인만의 프롬프트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고뇌와 정제의 과정이 없다면 그건 '창작'이 아니라 그저 '복제'에 불과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