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촬영, kbs1 ‘더보다’ 출연
'소리 없이 피어나는 전자책'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여행 에세이를 전자책으로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다음 편이 문제다. 시리즈를 계속 쓰려면 내가 먼저 여행 에세이 원고를 완성해야 한다. 원고부터 완성해야 제대로 된 내용으로 연재할 수 있다. 그런데 몇 주째 원고 작업을 미루고 있다. '어차피 쓰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미뤄왔는데, 이젠 부담스러워진다.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면 시리즈도 더 이상 나갈 수 없다.
금요일 밤, 동네 치킨집에서 친구와 맥주 마시며 야구를 보고 있었다. 와이스가 승리를 챙겼고, 김서현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잠들기 전에 ‘원고를 쓰지 못한 날 자책하는‘ 시간을 따로 만들었는데, 오늘은 그 자책조차 미뤄보려 한다. 참나… 맥주 한 모금에 모든 게 느슨해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 톡방에서 온 메시지였다.
뭔 촬영? 저번에 흘러가듯이 말했던 그 방송인가?
곧장 예상치 못한 전화가 왔다.
"월요일에 깔끔한 복장으로 출근해 주세요."
평소 티셔츠 한 장 그리고 청바지로 출근하는 나에게 '깔끔한 복장'이라니. 뭔가 심상치 않은 신호였다.
설마... 나도? 어쩌나, 어떡하지?
(중간 내용은 생략)
촬영팀이 도착했다. 'kbs1 더보다' 촬영팀이었다. 방송 촬영팀이라길래, 괜히 1박 2일이나 무한도전에서 보던 수십 명의 인원을 상상했나 보다. 그런데 기자님, 촬영감독님, 촬영 스태프까지 딱 세 분만 오신 게 잠깐 신기했다. 생각보다 소규모였다.
"오늘은 평소 업무하시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찍어보려고 합니다."
기자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됐다.
예능에서 자주 보던 그 장면, 스태프가 마이크를 옷 안에 넣어주는 걸 실제로 당했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 게다가 날 향한 카메라가 무려 세 대. ‘이런 경험을 평생에 몇 번이나 해보겠어’ 싶으면서도, 혹시 얼빠진 얼굴로 방송에 나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동네 아저씨고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촬영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기자님과 촬영 기자님이 원하는 장면은 반복해서 연출했다. 평소처럼 일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니, 정말 평소처럼 하면 되는 거였다. 기자님도 생각보다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주셨고, 어느새 나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AI를 활용해서 업무 효율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실제로 어떤 부분에서 생산성 향상을 체감하시나요?"
"AI를 도입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카메라 앞이라 긴장됐지만, 질문을 받다 보니 내가 뭘 하고 있는 사람인지 다시 돌아보게 됐다. 그러다 기자님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AI가 쓴 글, 사람이 쓴 글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람이 쓴 글에는 자연스러운 경험이 담깁니다. AI도 정교한 프롬프트로 유사한 서사를 구성할 수는 있다만,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은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기자님을 오늘 만난 상황을 글로 쓴다면 저는 금요일 밤 치킨집에서 야구를 보던 순간부터 촬영을 준비하며 느꼈던 감정들을 따라가며 글을 쓸 거예요. 하지만 AI는 그 맥락을 체감하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아직까지는 사람의 글이 더 섬세하고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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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대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끝나고 나서야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그걸 후회(後悔)라고 부르는 걸까.
실제로는 이렇게 답변했다.
어... 그... AI 특유의 말투가 있어요... 네...
촬영이 끝났다. 낯선 하루였고, 제대로 답하지 못한 질문이 마음 한켠에 맴돌았다. 집에 돌아와 다시 맥주 한 캔을 따려던 참이다. 오늘도 원고는 못 썼지만, 글감은 생겼다. 글은 자책과 망설임 사이에서, 이렇게 조금씩 써지기도 하나보다.
오늘도 배웠다. 많이 배웠다.
ps. 언제 방영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주제는 'AI를 통한 생산성 향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