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essay music ‘천천히’를 만들기까지
나는 ott로 영화를 볼 때, 영상 하단에 있는 재생 바(bar)를 한껏 뒤로 밀어 결말부터 훑어본다. 영화 내내 쌓이는 긴장감을 끝까지 품고 집중하는 게 요즘은 버겁다. 감독이 치는 장난에 계속 놀아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온전히 영화를 보기엔 집중력이 예전만 못해서인 것도 있다. 그냥 결말부터 시원하게 확인하고 맘 편히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를 다시 본다.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면서 틀어놓고 보는 쪽이 지금의 나에게 더 잘 맞는다.
유튜브 영상도 비슷하다. 댓글 창을 열어 둔 채로 영상을 본다. 댓글에 웃긴 말이 많아 영상과 댓글을 세트로 본다. 누군가는 웃긴 장면을 타임라인에 다시 찍어주고, 누군가는 자막으로 못 들은 한마디를 대신 적어준다. 혼자 보는 영상인데 같이 떠들면서 보는 기분이 난다.
최근에 suno가 업데이트되면서 이 친구가 만드는 음악이 눈에 띄게, 아니 귀에 띄게 좋아졌다. 어릴 적 레고 갖고 놀듯이 이것저것 끼워 맞춰 보면서 잘 가지고 놀고 있다. 음악만 만들고 폴더에 쌓아두기엔 아까워서, 언젠가는 sokmal 유튜브에 올려야지 하며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댓글을 본다는 건 결국 글을 읽는다는 뜻이네.'
'그렇다면 굳이 뮤직비디오가 아니어도, 음악에 글을 얹어서 같이 들려줄 수도 있겠다.'
유튜브 댓글을 훑듯이, 음악을 들으면서 한 편의 글을 읽는 어떤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만들었다. 에세이와 음악을 붙여서, 에세이 뮤직!
원래부터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었는지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처음 보였으니, 나 한정 최초 에세이 뮤직이다.
이번에 만든 ‘천천히’는 내 첫 에세이 뮤직이다. 글 먼저 쓰고 음악을 만들면 좀 더 수월하게 가사를 쓸 텐데, 반대로 하느라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하는 게 여간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힘 빼고 쓰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머릿속에서 가장 잘 보이는 생각을 눈에 보이는 대로 끄적였다. 잘 만든 문장이나 멋있는 결론을 떠올리기보다, 지금 내 상태에 솔직하려고 했다.
암튼 음악과 함께 즐겨주시길!
(영상 밑 '더보기'를 눌러야 글이 나온다)
노래에 담긴 글도 남겨본다.
1
중국에서 ‘어떤 박쥐 바이러스가 창궐했다’라는 소식을 서울 첫 자취방에서 들었으니, 낭만러너 심진석 님이 관심을 받는 지금, 전 서울살이 6년 차겠지요. 집돌이고 사람 많은 곳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한들 지방 촌놈이 처음으로 서울에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설렜을까요? 1년에서 2년 동안 서울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사람들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로 서로 지나치고, 저도 늘 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니까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죠. 불편했던 그 시절을 잘 보냈습니다. 그 땐 학창 시절만큼 멀게 느껴집니다. 숨 쉴 때 습기 찼던 마스크 냄새도 이제는 잊혀갑니다.
각설하고 서울살이 6년차, 이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뭐 이유가 뭐가 됐건, 그 결정을 만들었던 복잡한 마음이 뭐였든 간에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금도포를 두르고 출세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나름 괜찮았거든요.
무엇보다…제가 뭘 적어 왔거든요!
2
밥벌이를 가능하게 해준 노트를 6년 동안 한 권 만들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학창 시절 쓰던 얇은 500원짜리 공책처럼 별거 없어 보이네요. 페이지 수도 많지 않고, 낡아서 모서리가 조금 접혀 있고, 글씨도 고르고 반듯하지 않네요. 그래도 여기엔 지금까지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습니다.
내려가려면 석 달 정도 남은 지금, 노트를 펼쳐봤습니다. 여기엔 글로 담을 수 없는, 오감으로만 느껴야 할 그때의 소중한 감정도 있지만 반대로 차마 눈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뻘쭘한 소름이 돋는 부끄러운 기억들도 있네요. 기록이라는 게, 참 멋지기도 하고 가혹하기도 합니다.
이게 애물단지가 될지, 돈 벌어다 주는 황금돼지가 될지는 고향에 내려가 보면 알 수 있겠어요. 기대라기보다 그냥 궁금합니다.
3
책은 뭘 하나씩 꼭 말합니다. ‘남은 나와 다르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주인공은 힘들었지만 결국 잘했다’ 뭐 이런 굵직굵직한 메시지요. 제 서울 살이 노트는 ‘그냥 천천히, 그냥 해라’라고 말하고 있네요. 슴슴한 날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흠과 자취가 뒤섞여 있음에도 결국에는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더라고요.
별 의미 없는 말 같아도 이상하게 그 말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뭘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기보다, 그냥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달까요.
요즘은 걷다가 잠깐 멈춰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대로 두면 될까요? 조금씩 흘러가고 있는 것들에 욕심을 버려야 할까요?
4
낮 온도가 38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 빼곤 걸어서 출퇴근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니는 게 좋더라고요.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디지털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대부분인데, 걷는 동안만큼은 그 화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쇼츠 영상이 아닌 사람들 걷는 모습, 엑셀 sheet 아닌 차가 지나가는 도로. 매일 같은 길이지만 눈을 들면 조금씩 다른 장면이 지나갑니다.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다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집니다. 마치 명상과 비슷하달까요.
유독 야근이 힘들었던 퇴근길에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고, 차가 한 대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젖은 도로 위로 번지던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