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중간한 아이 #가짜자기 #외적동기
언니는 특별했다. 동생인 지원에게는 그랬다. 너무 주관적이었나.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언니는 전교 1등이었다. 지원은 평범했다. 이 또한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으로 그녀를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냥 80점 정도 나오면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중간한 아이. 학년 평균, 표준편차까지 생각해본 적 없다. 물어보는 사람도 없기에 딱히 등수도 모른다. 뭐 누군가에게는 나쁜 성적, 또 누군가에게는 괜찮은 성적일 수도 있겠지. '어중간하다'는 말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주관적 평가가 객관적인 수치보다 명확하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지원에게는 '성적'이었다. 본인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언니가 잘했던 건데 그녀에게는 성적이라는 가치가 너무도 컸다. 아버지는 큰집에 가면 항상 언니가 전교 1등임을 자랑했다. 우리 집 대들보, 아이큐 142, 책벌레. 이러한 평가 때문이었을까. 큰아버지 댁에서 언니는 방구석에 앉아 항상 책을 봤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어른들은 언니에게 명절에도 책을 읽는다며 대단하다고 했다. 그래서 지원도 책을 읽었다. 아니 읽었다기보다는 언니 옆에 어중간하게 앉아 책 보는 흉내를 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지원에게는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또래 아이들이 방탄소년단, 세븐틴을 좋아할 때 지원은 장기하 음악을 찾아들었다. 이유는 장기하가 서울대를 나와서였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음악까지 잘하다니 너무 멋졌다. 비비가 부른 <밤양갱>이 아이돌 노래만큼 인기를 끌었을 때는 너무나 뿌듯했다.
― <밤양갱> 장기하가 작곡, 작사했다.
― 장기하가 누군데?
― 서울대 나온 가수야. 음대 아니고 사회과 나왔어!
집에서는 반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영이를 칭찬했다. 영이는 천재인 거 같다. 쓰지 않고 교과서를 눈으로 훑어보기만 해도 내용을 기억한다. 이번 수학 시험도 가장 잘 봐 경시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영이의 이름은 외우지 못하셨지만 종종 영이의 안부를 물으셨다.
― 그 1등 한다는 친구는 잘 지내니?
― 응. 경시 대회도 우승했어. 천재야!
이렇게 성적에 집착하는 지원은 정작 자신이 1등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 그건 그녀가 선망하는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 그래서 지원은 노력은 안 하면서 머리가 좋아 공부를 나름 잘하는 캐릭터가 되어 특별하고 싶었다. 지원은 일부러 교실에서 공부를 안 하는 티를 냈다.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에 피 눈물을 흘리는 부두 인형 그림을 그렸다. 시험 날 아침에는 어제 그냥 자버렸다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차라리 대놓고 성실하게 노력했다면 그토록 바라던 '공부잘하는 아이'가 되었을텐데. 지원은 공부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인과관계에 따르지 못할 만큼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한 반면 노력 없이 높은 성취를 달성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도 않았다.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별 다를 바 없는 어중간한 아이. 지원의 어중간함은 특별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세상은 '노력은 안 하는데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타이틀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어중간한 성적의 아이의 잘난 척을 들어줄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다.
― 일상생활만 되면 되지.
부모님도 딱히 지원에게 기대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공부를 잘하라 요구하지 않았다. 전교 1등 언니의 동생, 수학 경시 대회 최우수상을 받은 영이의 친구. 언니와 영이를 자랑하는 일 외에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너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라 부럽다고. 하지만 할 수 있지만 할 게 없다면? 객관적으로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나이, 주관적으로는 그래서 비참한 나이.
열네 살 기차역에 수많은 기차들이 정거한다. 하지만 지원은 어떠한 기차도 탈 호기심도 의지도 없다. 영이가 녹색 기차에 오른다. 초록색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아이들도 자신의 기차를 찾아 오른다. 고장 나거나 방향이 잘못된 기차를 선택한 아이들도 즐거워 보인다. 지원은 기차를 찾느라 분주한 친구들을 바라보며 개찰구 모퉁이 어딘가에서 그저 시간을 어정쩡하게 때운다. 노인이 된 기분이다. 검지 손톱으로 엄지 손가락 살점을 짓누른다. 인생이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