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수민 Aug 01. 2020

라디오DJ가 청취자들을 그림으로 그려드렸다.

얼치기 <버들류 화백>의 캐리커처 작가 도전기

나는 MBC라디오 표준FM의 아침시사 프로그램인 <아침앤뉴스 류수민입니다>의 진행자다.

아침,저녁,마감뉴스까지 여러 TV뉴스를 진행했고, '1시간짜리 뉴스 브리핑' 성격의 프로그램이라지만 '아침시사프로그램 진행'이란 16년차 아나운서인 나에게도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평생 '잠탱이'로 살아온 내가 1년 가까이를, 몇시에 잠이 들든 새벽4시면 무조건 일어나서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집중력을 발휘해 뉴스를 챙겨본 뒤 5시엔 출근을 해야했고, 시사평론가와 '티키타카'로 핫한 뉴스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역할도 해야하니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짧은 시간에 많은 뉴스를 전하기 위해서는 스트레이트 뉴스도 꽤 많이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아침이니까 힘이 없고 발음도 잘 안되지만, 또 '아침이기 때문에' 더 활기차고 힘이 있어야 하며, 

아나운서니까 읽다가 절어서도 곤란하다. 

MC역할의 한 축을 담당하는 오프닝도 있다. 그 내용으로 청취자 문자를 받는데 중간중간에 문자 소개는 예독 할 수 있는것이 아니므로 미리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도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준비를 대략 15분만에 다 해야 한다는것. 음악 방송과는 달리 방송 직전, 혹은 방송 중에도 내용이 업데이트 되는 특성 때문에 DJ가 충분히 숙지하도록 원고가 미리 준비 될 수 없다.

3분짜리 라디오 뉴스도 15분의 준비시간이 있는데, 4배도 넘는 버라이어티한 내용을 짧은 시간에 다 소화해야 한다.

아침 잠이 많은 잠탱이 DJ의 입장에선 고단한 일이었지만 청취자들은 하나같이 부지런하게 하루를 준비하는 분들이었다. 출근길에 최근 뉴스를 업데이트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분들이 제일 많고, 영업개시나 식구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분들까지... 아침 6시~7시라는 시간은 꽤 부지런한 사람들의 시간이었다.

 

말실수 할까봐 긴장하던 시간이 지나가자, 

TV를 포함해 수많은 프로그램 중 우리 프로그램을 늘 선택해주고, 바쁜시간인데도 문자로 참여해주며 대단치 않은 '나'란 사람을 응원해주는 청취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 청취율 조사기간이 겹쳐서 모든 팀과 DJ들이 뭔가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데, 우리팀은 단 한번도 프로그램 홍보는 커녕, 뭔가 되돌려드리려고 노력한 일 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늘 뒤에서 잠도 못자고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제작진을 위해서라도 '내가 뭔가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뒤늦게나마 문득 들었던 것이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한두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정성'을 선물하기로 했다. 

청취자들이 신청하면 추첨해서 사진을 받고 그분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내드리기로 한 것이다.

제작진이 장난 삼아 붙여준 '류화백'이라는 별명과 내 성을 본따 '버들류'가 합쳐서 

나는 청취자들에게 '버들류화백'이라는 정겨운 별명을 얻었고, 얼떨결에 '화백님'이 되어버린 얼치기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버렸다.


제작진은 총 5명의 당첨자를 골랐는데, 그중에는 '직업이 농부인데 명함에 넣을 캐리커쳐'를 신청한 분도 있었고, '꽃집을 운영중인데 간판에 쓰고싶다'고 밝힌 꽃집 여사장님도 계셨다. 그리고 출근길에 늘 함께한다는 젊은 남성 직장인(우리 방송의 다수를 차지하는고객층이다^^),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아빠, 다둥이가 함께한 가족그림을 갖고 싶다고 신청한 가정적인 가장도 있었다.


다양한 사연과 각기 다른 분위기의 청취자들을 가깝게 만나는 느낌은 무척 흥분되면서도, 막상 결과물을 받고 '안닮았다'고 느끼거나 마음에 안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어떤 날을 퇴근시간이 지나서까지 회사 구석 아무도 없는 빈공간에 틀어박혀, 기능도 채 익히지 못한 아이패드를 붙들고 수공업(?)을 하느라 거북목에 토끼눈이 되어 끙끙거리는 날도 있었다.

 아침마다 내 방송을 듣는 아버지는 '청취자만 그려주고 왜 나는 안해주냐, 나도 그려달라'며 압력(?)을 넣으시기도 했다. (죄송해요 아부지... 일단 저 분들부터 빨리 보내드려야 해서;;; 근데 귀여우시네요^^)


그렇게 끙끙대며 완성한 작품(?)을 SNS에 선공개하자 '놀랍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고, 그중에 당첨자들의 댓글도 등장했다. 이미 나와 인친인 분들이 있었다. 청취자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진심으로 기뻐해주시는 것 같아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서 뿌듯했다. 

방송을 앞두고 가끔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사고만 없이 대충 좀 넘어가자' 했던 날들이 떠올라 부끄럽기도 했다. 이벤트를 하면서 그리는 속도도 빨라지고 아이패드 기능도 더 익숙해지는 수확도 있었다. 

당첨자 중 꽃집을 운영하는 사장님께선 나의 작은 선물에 다시 꽃선물을 보내 사랑을 되갚아주시니

'세상은 커다란 학교'(MBC라디오 캠페인 문구)란 말이 새삼 와닿는다.

 

제작진이 결과물을 사진으로 프린트해 액자에 넣어 택배 발송을 한다기에

완성된 그림파일을 서둘러 수정했다. 

<MBC라디오 아침앤뉴스 류수민입니다.>라는 로고를 추가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 프로그램을 할지 모르지만...이 로고를 보고 이분들이 나를 오래 기억해주실까?


마지막까지 최선의 마음을 쏟았다. 

부디 나의 진심이 저장되어 고이 발송되었길...

그렇게 전달된 사랑이 잠시마나 생면부지의 친구들께

기쁨으로 가 닿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19검사를 받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