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의 충동이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주길
Part 1. 책의 내용과 여행
<아드레날린 완충에 필요했던 시간 단 5분>
글을 쓰다 문득 팔레르모를,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항공권을 찾았다. 10월 9일 출발. 10월 16일 도착. 금액은 약 220만 원. 아래에는 그곳의 호텔이 1박에 3만 4천 원이라고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고, 옆의 탭을 누르면 그곳의 렌터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 딱 5분이 걸렸다. 단지 이 5분 동안의 검색만으로도 나는 커다란 흥분과 즐거움에 휩싸였다. 생활을 등지고 떠나 정제된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토록 즐겁고 흥분된다. 여행의 시작은 어느 지점에 있을까. 나는 여행 가기를 마음먹은 그 순간이 여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여행을 계획하던 5년 전 30살의 내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계획을 짜고 있었지만 그때 나는 이미 일본 여행 중이었다. 그리운 그 순간의 흥분과 즐거움. 다시 느껴보고 싶어졌다.
<그를 통해 경험한 시칠리아 탈여행>
시칠리아를 잘 모른다. 이탈리아 땅인지도 이번에 알았다. 이렇게 낯선 도시를 나는 책을 통해 접촉했고, 상상해볼 수 있었다. 촉촉한 느낌은 아니다. 건조하고 권태로운 느낌. 조금은 텐션이 낮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 속에서 역사 속 인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문화유산 탐사 답사를 떠나는 것만 같을 느낌. 책을 읽으면 문득 사진을 보듯이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문장을 정확하게 쓴 김영하 덕분일 것이다. 대체 불가한 완벽한 문장들을 나는 이 책 속에서 계속해서 만났으며, 그 덕에 울산의 재래시장 한 복판 카운터에 앉아 시칠리아를 여행할 수 있었다. 직접 가는 여행만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었다. 탈여행이 있었다. '여행의 이유'를 읽고서 나는 여행에 대한 아쉬움과 죄의식을 조금은 덜어내었다. 이렇게 생활의 사슬을 몸에 칭칭 두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티브이와 모니터를 보면 나는 탈여행을 할 수 있다. 작은 위로가 됐다. 오감으로 현장을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을 앞으로는 탈여행으로 달랠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느리고 천천히>
내 마음속 이탈리아의 첫 모습은 2002년의 아주리 비에리다. 이어서 세리에 A의 경기장과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홍염들, 유벤투스와 두 밀란의 줄무늬 유니폼. 그리고 토티와 네드베드가 떠오른다. 나는 이탈리아를 축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축구의 격렬함만큼 나에게 이탈리아는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나에게 두 번째 이탈리아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촬영지가 이탈리아라는 걸 몰랐으나 무심결에 떠올라 검색을 했더니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어떻게 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이탈리아를 연결 지었을까. 내 마음속 이탈리아와는 너무도 다른 느낌인데. 신기했다. 그곳은 ‘크레마’라는 곳이었다. 영화 속 집과 정원의 모습, 그리고 마을 풍경이 떠오른다. 조용하고 따분하겠지만 평화롭고 따스한 곳. 한 달 살이를 하러 떠나고 싶어 진다. 시칠리아와는 정 반대의 느낌이다. 만약 이탈리아를 찾아 여행을 간다면 나는 어디를 가게 될까. 가장 좋은 것은 둘 다 가는 것이다. 각각 한 달씩.
나는 지구상의 가보고 싶은 곳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중이고, 울산 남구, 더 정확히는 법정동 신정1동의 3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반경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좁은 생활 반경이 점점 더 갑갑해지는 중이다. 그리고 자꾸만 떠나고 싶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미정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한 곳이라도 더 많이 가서 느끼고 담고 글로 배설해내고 싶다. 내가 이 행위들을 미진하게나마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면, 나는 점차 '여행 중인 나'에 맞추어 '여행 중이지 않은 나'를 조절해 갈 것이다. 어떤 영감이 나의 다음 갈 길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행선지 일 수도 있고, 삶의 방향과도 같은 커다란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영감은 번개처럼 크고 강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모닥불 연기 피어오르듯 내 주위에 맴돌다 끝내 나를 감싸버리기도 할 것이다.
Part 2. 이야기꾼 김영하
<이야기꾼의 자유로움>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요즘에는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있는데, 글이 참 다르다. 김영하의 글은 조금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것은 이야기꾼과 평론가의 결의 차이일 것이다. 여행기라 더 그랬을 것 같지만 본질적 차이는 역시 앞서 말한 ‘직업’의 차이인 것 같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1차 창작자와, 1차 창작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2차 창작. 자유롭게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는 사람과, 어떤 결과물을 보고 관찰하고 느끼고 분해하고 재조립하며 그것에서 새로운 창작물을 다시 만들어내는 사람. 그 차이가 아닐까.
이야기꾼은 조금 더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으며, 감정적이다. 김영하가 문장에 감정을 뚝뚝 녹여내는 사람이 아님에도 그의 글은 충분히 감정적이다. 이것은 읽는 이의 입장에서 말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하겠으므로, 그렇게 다시 바꿔 표현하자면, 김영하의 글은 나를 감정적인 상태로 만든다. 그의 문장은 내 안에서 감정을 끄집어내고 나는 동요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나의 동경과 갈망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해방을 줄곧 부르짖어온 겁쟁이 속박자다. 때문에 늘 마음속에 자유로움을 지니고 그것을 실천하고 사는 이들을 동경해왔다. 나는 그의 문장에서 그러한 모습들을 발견했고, 때문에 감정은 요동쳤을지도 모른다.
<야수성의 회복>
하지만 그런 김영하 조차도 부자유했던 때가 있었다고 그는 책에서 고백한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퍼지게 되는 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인 것 같고, 그건 자유로운 한량이자 건달이었던 김영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는 성공하여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가 되었고, 인사이더가 되어 누리는 달콤함에 자신의 날카로운 야수성을 잃어버렸었던 모양이다. 환경은 사람을 저도 모르는 새 변화시키곤 한다. 자신이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는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지 못해 안주하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던져버린다. 김영하는 후자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었다. 그는 아내의 충고를 듣고서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던질 수 있었고, 다시 자유로워졌다.
순간 스티븐 킹이 떠올랐다. 쓰레기통에 버렸던 작품 ‘캐리’를 다시 꺼내어 세상 빛을 보게 한 것은 아내 태비사의 덕이었다. 킹은 '캐리'의 출판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캐리'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작품이었다. 잡지사의 쓴소리로 짜증이 나 쓰레기통에 버려졌었던 캐리를 아내인 태비사가 다시 꺼내어 완성으로 이끌었다. '캐리'의 훌륭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쓴소리를 했던 출판사 직원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아주 많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내 작은 예술가를 보호해주고, 그가 산고 끝에 무사히 작품을 출산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 킹처럼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이렇듯 나는 김영하의 아내의 이야기를 보고서 킹의 아내 태비사가 떠올랐고, 두 사람이 몹시도 부러워졌다.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떠올랐다. 마약에 찌들어 있었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햄버거 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끼곤 마약을 단숨에 끊어버린다. 보통은 이렇게 우연히 찾아오는 각성의 순간을 운 좋게 만나야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일깨워줄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충고의 형태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고, 나는 그 충고를 귀 기울여 들을 만큼 그 사람을 깊이 신뢰하고 있어야 한다.
모두 다 어려운 일이다. 운 좋게 나에게 각성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도, 곁의 누군가를 깊이 신뢰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영혼을 일깨워줄 좋은 충고를 해준다는 것도. 김영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나는 그가 평생의 지구 여행 동반자를 아주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평가가 아니다. 지극한 부러움이다. 이런 관계가 바로 참 파트너십이 아닐까.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이 있다.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의 옆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좋은 사람인지 한 번 생각해본다.
Part 3. 나의 이야기
<불결함을 멀리하려 했던 나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려면 그 이후에도 계속 책을 들여다봐야 할까? 나는 이 행위에 대해서 어떤 ‘반칙’이라고 여겼다. 마치 암기력 테스트를 하듯이, 한 번 보고 나서 그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리뷰를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내 안의 순수성을 지키려 하는 태도였던 것 같다. 여러 번 들춰보며 감각을 보충하는 것은 불결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래서 방금도 책을 다시 들춰봤다. 통독으로 읽어 내려갔었을 때 눈에 띄지 않았던 빛나는 조각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신형철은 영화 글 하나를 쓰는데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영화를 대여섯 번을 보고, 치밀한 설계 속을 최선을 다해 써서 채우고 나면 한 달이 지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도 하나의 글을 위해 영화를 여러 번 보고 한 달의 시간을 들였다. 그 얼마나 큰 정성이고 노력인가. 그도 책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렇게 세상에 나오는 글들이 있는데 한 번 읽고 리뷰를 줄줄 써 내려가려고 했던 나의 태도는 얼마나 오만한가. 부끄러웠다. 신형철은 좋은 글을 써내기 위해서 그 어떤 준비와 노력과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는 첫 회독의 ‘감상’을 생생하게 남기려는 데 중점을 맞추고 있었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태도를 접하고서 나는 마음속 고정관념을 수정하였고, 앞으로는 보다 더 정확한 글쓰기를 위해 책에 파편적으로 반복해서 접근하는 것에 불결함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나홀로 여행자가 되어야 할 때>
여행지에서 많은 우연들과 부딪힐 때의 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일단 나는 결과적으로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쪽이었다. 일신상의 위험을 감지하지 않는 이상은 우연을 마주쳐도 크게 곤란해하거나 당황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아무렇지 않았던 것에 반해 동반자의 눈치를 많이 봤었다. 우연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늘 “아. 어쩌지 괜찮을까.”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살폈다. 나는 왜 동반자의 눈치를 봤을까. 내가 주도해서 가는 것도 아닌데, 내가 호스트도 아닌데, 둘 다 같은 게스트일 뿐인데.
상대들은 제각각의 반응들을 보였다. 어떤 동반자는 이것도 여행의 묘미라며 찾아온 우연을 불쾌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내 마음은 편해졌다. 또 다른 동반자는 찾아온 우연에 계획이 틀어져 불같이 화를 냈다. 내 마음은 불편해졌고 미안했고 나는 작아졌었다.
문득 떠오른다. 혼자 가는 해외여행은 어떨까. 2017년의 오사카/교토 여행이 생각났다. 나는 친구보다 하루 먼저 오사카에 도착했다. 길을 찾아 캡슐호텔에 짐을 풀고, 보드카 레몬 캔 하나를 따서 창밖을 보며 로비에서 마셨다. 로비 정중앙에는 여행자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는 거기 끼지 않았다. 1층의 편의점에는 일본어가 가득했다. 도시는 빛이 났다. 캡슐호텔에서 잠은 잘 왔다. 나는 그때 깊은 해방감과 자유를 느꼈던 것 같다.
우연이 닥치는 것을 개의치 않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그의 심경을 유심히 살핀다. 좋은 표현으로는 '섬세한 사람', 그렇지 못한 표현으로는 '눈치 많이 보는 사람'이 되겠다. 이런 나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상태일 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혼자여야만 한다. 혼자서 짧게 여행을 가보고 싶어졌다. 조금은 외롭겠지만 괜찮을 것이다. 일본이 적당할 것 같고, 큰돈은 필요치 않을 것이고, 마침 여행길은 뚫리기 시작했다.
<고민 끝의 충동이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주길>
글을 쓰다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나는 11월의 가게 휴일을 찾아보았다. 휴일을 껴서 2박 3일의 일정을 잡아보았다. 그래도 엄마 혼자 이틀을 장사를 해야 했다. 양해를 구했고 이해를 받았다. 항공권과 숙소를 검색했다. 가장 싼 티켓과 숙소를 찾았고 거기에서 아주 조금 비싼 것들을 선택하는 사치를 누렸다. 후쿠오카행 2박 3일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는 11월 4일과 6일에 뜨지만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의 날은 11월 4일에 디데이가 맞춰져 하루하루 깎여져 나갈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여행 준비를 할 것이고, 설렘과 벅참으로 기꺼이 검색의 중노동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했다. 약 70만 원의 돈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금액이기도 하다.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었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그때 갈까.” 그러나 곧장 일시불로 모든 결제를 마쳤다. ‘사정이 조금 나아질’ 그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저 문장이 나를 여태 여행하고 다니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있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갈림길에 설 때가 있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나는 그곳에서 쉬이 발을 떼지 못하고 얼마간 머물렀다. 정주할 것인가, 방랑할 것인가. 나는 정주지에서 방랑하고자 하는 인간이었다. 참을성도 용기도 없어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겁쟁이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방랑과 떠돎의 길로 한 발자국 접어들었다. 김영하가 나를 떠밀었다. 아니 내가 그로 하여금 나를 떠밀게 했다. ‘여행의 이유’를 골랐고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골랐다. 연이어 읽은 두 권의 책은 나를 방랑자의 길로 과감하게 발 뻗도록 했다. 둘 다 읽었던 책이었다. 내용은 알고 있었다. 아마 나는 방랑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고, 선택의 순간에 어쩌면 용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지 않는 그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마음이 나를 김영하의 여행기 책 두 권을 주문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떠돌며 살고자 한다. 세상 밖에서 마음껏 통제력을 회복하며 자유로이 떠돌 수 있는 나를 기대하고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