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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신(神) / 데비 - 리뷰

내 인생의 왓이프

by 오달피
화면 캡처 2022-10-01 232612.png

<우리가 상상에 과몰입하게 되는 이유>

많은 공시생들이 특정 과목에 과몰입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특정 과목은 한국사인 경우가 많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갖춰 공부하다 지친 마음을 기대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 스토리에 감정이입을 하고 빠져들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답답함을 느끼고, 안타까운 역사의 특정 지점에서 상황 가정(if)을 하기 시작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젖어 살게 만드는 그 무서운 'if'.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민족의 역사에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자주독립을 이뤘더라면.”등과 같은 많은 가정들은, 이야기에 살을 붙여 나가며 더욱 뜨거워진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 그리고 욕망. 그러한 감정들을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멋진 ‘왓이프’로 꾸며놓은 세상을 나는 ‘주간 신(神)’에서 보았다.

아는 만큼 보일 것이고 또 그만큼 뜨거워질 것이다. 역사 이야기는 쉽게 발 들여놓을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커다란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선수들끼리’ 통하는 게 있는 것이고 창작자 데비는 스스로 역사 덕후라고 밝혔을 만큼 그 지식의 넓이와 깊이가 상당한 ‘선수’이다. 진지하게 한국사 공부를 해봤거나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만든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왓이프’에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앞뒤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그의 왓이프가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 후반부는 그가 만든 왓이프가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전반부에는 작가의 가치관을 잘 느낄 수 있고, 후반부에서는 왓이프가 흘러가는 것을 보며 엄청난 몰입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후반부에서 커다란 재미를 느꼈지만, 보고 나니 기억에 맴도는 건 전반부였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가치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우연과 불확실성. 혼돈의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

일주일간 신의 권능을 얻은 주인공은 역사를 ‘통제’하여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본인의 ‘전지전능함’으로 역사에 ‘개입’하여 ‘힘’을 휘두르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시간으로 ‘절대적 통제’를 이루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불확실성 앞에서 계속해서 무너진다. 이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던 근대의 합리성의 한계와,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속에서도 이러한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데,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원하는 ‘결과’를 위해 계획대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근대화 시대에 잠깐이나마 가능했던 일이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적 이벤트에 삶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원하는 결과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했으며, 그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 결과는 하늘(미지수)에 맡겨야 한다"는 것은. 김영하가 말한 ‘카프카적 상황’과 고대의 지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우연의 변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삶과 결과를 통제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의 좋은 예를 ‘여행의 이유’ 속 ‘프로듀서 팀’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누구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그 프로듀서는 프로그램 제작의 모든 과정을 알고 통제하고 간섭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팀의 모두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그것들이 모이고 편집돼서 결과물을 제시간 안에 나오게 하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자기들도 ‘정말’ 잘 모른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어떤 ‘음식’이 나올지 모르는 집단적 ‘요리’의 과정을 그들은 해오고 있었던 것이고, 제작 과정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던 그의 프로그램들은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시대는 변화했지만 아직 낡은 모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고,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고 내지 못할 결과는 없으며, 혹여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의 부족이기 때문에 더욱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현재의 삶에 효과적인 태도일는지, 만약 그게 능사가 아니라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나는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주인공은 본인을 중심으로 한 계획이 모두 처절한 실패로 끝나자, 태도를 바꾸어 관조자의 자세로 이 역사가 바르게 흘러가길 기대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대한민국은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한다. 수많은 우연의 결과들 속에서 운 좋게도 최상의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낸 창작자 ‘데비’에 대해서 생각 하기 시작했다.


<본캐와 부캐>

최근 본캐와 부캐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꽤 많이 하고 지냈다. ‘부캐와 본캐 사이에 구별이란 있는 것인지’나 ‘그 둘 사이에 지위의 고하가 있는 것인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지냈는데, 결론은 “명백히 있다.”였다. 관두면 나를 굶어 죽게 할 수 있는 일이 ‘본캐’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과 꿈이 있지만 세상은 결국 의식주가 지탱해주지 못하면 와르르 무너진다. 나의 영혼의 정체성은 지금 내가 키우고자 하는 ‘부캐’에 가 있지만, 내 생활을 지탱하는 생활의 정체성은 월급을 위해 일하는 나의 ‘본캐’에 가있는 것이다.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부캐를 본캐로 만드는 것이다. 성장시켜 생활을 지탱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그럼 밥벌이를 위해 영혼의 울림이 없는 일을 할 필요도 없어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꿈같은 결과를 바라며 부캐 양성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방송연예계를 제외한 주변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사람은 드물다.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나는 재차 궁금해졌다.


<배를 일단 띄우면, 어떻게든 알아서 흘러가게 된다>

창작자 데비는 작품 속에서 “4회 단편을 생각하고 시작했던 만화가 길어져버렸다.”라고 했다. 계획과 달리 작품을 출발시켜보니 뜻한 바와 다르게 흘러갔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대학시절 작가 교수님에게서 들었다. 작가 김영하도 책에서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글이란 생명력이 있어서 일단 시작하고 빠져들어 속도가 붙게 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버린다(혹은 ”나를 전혀 모르는 세상으로 끌고 가 버린다. “).”라는 식의 말이었다. 나는 이를 떠올리며 굿을 하는 무당이 접신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잠시 앉아 생각을 굴려보고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해보았다. “형이상의 세계에 있는 작품은 나를 통해 세상에 현신하게 된다. 내가 작품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만들어 나가는 게 아니다. 작품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무의식 속 의식의 흐름이 나를 잡아끌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들여 자리에 앉아 그 작품이 나를 거쳐 세상에 드러날 시간적/공간적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뿐이다.”머릿속이 상쾌해졌다.

작품에 일정량 이상의 시간과 에너지가 투입되고 나면 작품은 생명력을 띄고 스스로 알아서 엔진을 굴려 나아가게 된다. 그때 내가 해줘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충실히 내 몸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작품이 완주를 위해 내 몸을 잘 ‘사용할 수 있게’ 하면 된다. 비행기의 이륙과 운행, 그리고 착륙의 과정이 떠올랐다. 비행기는 멈춘 상태에서 이륙할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동시에 커다란 저항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버틴다. 그리고 궤도에 오르면(임계점에 다다르면) 평온한 상태가 되고 이후로는 큰 힘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부캐 성장의 키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임계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나 역시 여러 번의 경험이 있다. 동시에 “사고방식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거기에 진짜 필요한 것은 ‘순간의 높은 화력’의 상태가 아니라 ‘불 때기'라는 활동을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이며, 이는 루틴을 통해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서운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첫 단추와 다음 단추들을 계속해서 꿰어낼 수 있는 방법>

사회는 우리에게 계속 ‘열정’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나는 결과를 내는 데 정말 필요한 건 열정과 같은 멘털적인 부분이 아니라, 반복되는 습관 속에 형성된 루틴과 같은 피지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피지컬적인 루틴의 무서운 힘을 요즘 헬스장을 다니면서 실감하고 있다.

나는 여태 헬스장에 여러 번 입문했었지만 3개월을 넘게 꾸준히 다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입문자의 위치 어디쯤에서 끝이 났다. 나는 헬스와 육체미에 대해서 굉장한 열정을 갖고 있었고, 가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결국 발길은 뜸해지며 중도에 끊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열정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에 번번이 좌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4개월째 운동을 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헬스장에 출근을 한다. 결과는 그 어느 때보다 좋으며, 아이러니하지만 의지와 열정은 예전처럼 불타오르지는 않는다. 생활에 루틴이 생겨 특별한 의지를 품지 않아도 저절로 운동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루틴의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장사를 해서 거의 매일 가게에 나간다. 일하면서 12-16시의 4시간 동안에는 가게를 나와 운동을 하고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출근해서 12시가 되기 전까지의 가게일은 정해진 시간에 헬스장으로 가기 위해 종류와 순서가 정해져 있으며, 12시가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가게에서 운동가방을 챙겨 헬스장으로 향한다. 헬스장에 가서는 오늘 어떤 운동을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운동 스케줄을 3일에 1바퀴가 돌아지도록 짜 놓았으며, 어제는 1번(가슴 세트)을 했으므로 오늘은 2번(어깨 세트)을 하면 된다. 내일은 3번(하체 세트)을 하면 될 것이다. 각 세트의 세부적인 수행과정(기구, 세트, 횟수 등)은 핸드폰 메모장에 다 기록이 되어 있어 보면서 따라 하면 된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어폰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상쾌한 샤워시간이 오고 운동은 끝이 난다. 물론 이 패턴을 정착시키기 위해 한 달 정도는 시행착오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지금, 나는 운동을 하루 두 시간씩 하는 행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운동을 하는 데에 큰 귀찮음을 느끼지도 않고 많은 노력을 한다고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나의 운동은 지금 이륙을 끝내고 순조롭게 운항 중이다.

물론 루틴을 만드는 게 쉽고 간단하지는 않다. 정착시키는 데에는 당연히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몸을 제시간에 제자리에 갖다 놓는 데에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으며 적응을 마치면 나의 공정은 자동으로 돌아가게 된다. 전업이 아닌 이상 자투리 시간을 내서 작동시켜야 하는 나의 부캐는 꾸준하게 시간과 노력을 제공받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텐데,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의지박약으로 여기고 힘들어하는 것 대신 내 생활을 철저히 루틴화 해보는 건 어떨까. 아마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던 작품이 버젓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왓이프>

콘텐츠 감상이 끝나고, 거기서 받은 영감들을 내 삶으로 끌고 들어와 내면화시키는 것은 아주 좋은 감상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을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는 내면화 없이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기만 하는 가벼운 감상자였다. 잠시간 오감만을 자극하고 끝날 뿐인 감상은 허무했다. 결국 감상 활동 자체도 뜸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글로 감상을 기록하기를 시작한 순간, 나는 달라졌다. 콘텐츠를 감상하고 글로 쓰기 위해 작품을 머릿속으로 끌고 들어와 이리저리 굴려보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콘텐츠를 내 생활과 삶과 생각에 접목시켜볼 수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콘텐츠 감상이 끝날 때마다 꼭 글로 리뷰를 남기려는 이유이다.

과연 내 삶에도 왓이프가 가능하다면 나는 어느 부분을 손대게 될까. 그 게임 속에서 나는 몇 번의 찬스를 사용할 수 있는가. 인생에 후회와 굴곡이 많을수록 되돌리고 싶은 순간은 많고 되돌리고자 하는 마음도 강해진다.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은 아빠와의 영원한 작별을 막는 것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나는 어느 지점으로 가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과연 아빠가 정말 세상을 떠나는 것을 확실히 막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어느 지점으로 다시 옮겨가야 하나.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에 잠겼다.

아빠와의 작별을 무사히 막아내고서도 남은 찬스가 있다면 나는 또 어떤 것을 바꿔볼 것인가. 이어서 몇몇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때는 아빠 때와는 달리 마음이 한결 편했다. 결과를 통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 후회되는 건 그때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내렸던 선택 그 자체였다. 때문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 단순히 그때의 선택을 재차 반복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새롭게 내린 선택이 나를 어떤 결과로 끌고 가든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참 우습다. 불가능한 일에 이리도 마음이 동해 글을 줄줄 적었다. 인간은 이렇게 상황 설정과 그 가정 속에서 마음껏 상상하고 헤엄치는 존재다. 이런 부분이 인류문명 번영에 큰 기여를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상상 속에 다녀온 내가 서글프기만 하다. 앞으로 또 해야 할 많은 선택들이 나를 찾아올 것이고, 예전처럼 후회 무덤에 쌓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과는 오직 내 두 어깨로만 짊어질 수 있고, 이미 내 어깨는 충분히 무겁다.

삶은 결국 통제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확실하게 낼 수 있는 유일한 결과물은 시간이 지나 먼지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뿐. ‘메멘토 모리’를 늘 생각하며 오늘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카르페 디엠’의 마음을 품고 살도록 하자. 이건 나에게 보내는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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