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에서 외롭고 고독한 표류자들의 이야기
<멀티버스를 열어버린 왕가위>
영화를 보고 나니 몽롱한 이미지와 짙은 여운만이 남았다. 부족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오랜 검색을 해야만 했다. 검색 후 내린 짧은 결론은 "2046은 왕가위 멀티버스 영화다."라는 것.
내 기억 속의 왕가위 영화들은 모두가 제각각 독립된 유니버스들이었다. 중경삼림, 타락천사,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동사서독, 화양연화. 그래서 나는 그저 그 세상에 집중하고 느끼고 만족하기만 하면 됐었다. 그런데 왕가위는 2046에서 멀티버스를 열어버렸다. 그 '탓'에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조금 혼란스러웠고, 자기 복제 가득한, 명작들의 중탕 같은 느낌에 어느 정도는 안타까웠고 또 실망스러웠다.
나는 2046이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형식을 갖추고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또 하나의 독립 세계관을 갖춘 영화일 거라 예상했다. 형식의 변화를 생각지 못했던 나는 그의 다른 영화들을 처음 봤을 때처럼 큰 기대를 안고 감상을 시작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기무라 타쿠야가 나오는 바람에 내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 기대는 큰 실망이 되었다. 멀티버스 속에서 간단히 소모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단독 세계관의 주인공이었다면 양조위랑 또 다르게 왕가위 페르소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움은 옅어질 줄 몰랐다.
<그의 필모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기무라 타쿠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잠시 샛길로 빠졌었다. 다시 돌아오면 결국 2046은 '왕가위가 자신의 필모 속 여러 영화들을 꼬챙이로 꿰어서 하나로 묶어 놓은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꼬챙이 속에는 왕가위의 필모를 관통하는 어떤 공통의 핵심 키워드 혹은 메시지가 담겨있을 것이다. 예리한 관객은 단번에 이를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시야가 좁은 나는 미처 그리하지 못했고, 후에 검색을 통해 "그것은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방황하고 고뇌하는 홍콩과 홍콩 시민들의 모습’ 정도의 것이 되겠다."라고 이해했다. 잠시 생각했다. “내가 봤던 영화들의 내용은 과연 그러했었나?”
순간 그의 필모들을 떠올려 보았다. 저 핵심 메시지가 마음까지 곧장 내려와 닿지는 않았다. 2046을 떠올려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특징인 은유 가득한 시적 대사, 중경삼림의 파랑과 화양연화의 빨강과는 다르게 탁한 청록의 느낌을 띄는 영상과 같은 이미지와 느낌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더불어 ‘어색했던 미래 묘사’, ‘깊이가 부족해 보였던 멀티버스’와 같은 아쉬움이 머릿속에 뒤따라 떠올라 잠시간 괴롭기도 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필모 속의 인물들을 이리 묶고 저리 묶어본 끝에, 나는 저 핵심 메시지를 마음에 접속시켜 낼 수 있었다.
<깊고 오랜 사랑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외로움, 고독, 우울, 혼란, 방황. 이와 같은 정서는 그의 영화들 전반에 가득하고, 나는 무심결에 그런 것들을 찾아내고선 그것들에 꽤 많이 젖어 들어 푹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의 영화 속에는 번듯하게 잘 사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방황하며 표류하는 사람들이다. 외롭고, 고독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사랑과 애정을 필요로 하지만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그런 인물들이 뒤섞여 이야기를 만들고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 정서가 관람자에게 전달된다. 나 역시 그러했었기 때문에 그의 유니버스 속에 빠져들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영화들을 봤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좀 더 들어가서, 홍콩 사람도 아닌 나는 왜 그렇게 그의 영화들에 미쳐 있었나. 그의 페르소나인 양조위에 왜 그렇게 푹 빠져서 나 또한 그를 나의 페르소나로 여기고 마음 깊이 사랑했었나. 나는 왜 아무것도 몰랐던 스물한 살 풋내기 시절에 중경삼림을 보고 미쳐서 왕가위 영화를 쫓아다녔을까.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도 나의 가장 소중한 이미지로 삼고 있을까. 또 왜 블로그 같은 온라인 속 개인 공간을 꾸밀 때면 가장 처음 찾는 게 중경삼림의 이미지이고 663의 사진일까.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마음 두고 살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을까. 여태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들에 잠겨 나를 잠시 되돌아봤다. 나는 왜 '이렇게 프로그램화’ 되어있었을까.
<내 사랑의 이유>
금방 답이 나왔다. "나도 고독하고 외로운 인간이었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혼란스럽고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시절 방황하는 홍콩인들의 고독하고 외로운 마음을 보여주고 위로하려 했던 왕가위 감독의 정서와 메시지가 내 마음도 관통해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기대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그 시적인 은유로 가득한 영화들에 내가 깊이 빠져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주위에 결코 털어놓지 않는 내 깊은 곳의 모습을 발견했었던 것 같다.
나는 주위에 현재 신변을 숨기지 않고 잘 알리지만 내가 현재 어떤 ‘정서의 상태 속에 있는지’는 거의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만 그런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앞서 말했던 ‘외로움, 고독, 우울, 혼란, 방황’과 같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속에 내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주변에 드러내지 않는 내 깊은 속내를 나는 홍콩의 어느 감독이 만든 영화 속에서 거울 보듯 발견해냈고, 거기서 어떤 강렬한 쾌감과 마음 깊은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받았다. 그랬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깐 내가 이렇게 깊이 빠져들어 세월을 보냈지. 이건 정서의 투영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물론 나는 지금도 앞서 말한 그런 정서들 속에 여전히 머물러 지내고 있다. 고독하고 외로우며, 혼란스러워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를 외롭고 고독하다 느끼는 정서.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해결책이 있을 것이고 끝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그저 “이것은 나뿐만 아닌 ‘모든 자연인의 상태’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계속 안고 가야 하겠구나.”라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해결 거리로 도마에 오를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진다. ‘내가 여기에서 벗어나 정상인의 상태로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낙심하여 깊은 우울과 좌절에 빠져버릴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지금의 이 상태에서 균형점을 잡고 살아갈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계속될 사랑>
네 식구였던 우리 가족이 세 식구가 되고서, 나는 내 몸도 마음도 닻 내린 정주의 삶을 살고자 했었다. 공무원도 되어보았었고, 이어서 결혼과 육아를 통해 ‘사회가 원하는 뿌리내림’이라는 걸 해보고자 했었지만, 결국 모든 걸 다 던지고 다시 샛길로 돌아와 있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이상한 책임감에 감정적으로 휘말렸었던 상태’로 인식한다. 이제는 내가 “이대로 계속 표류하며 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고,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왕가위 감독과, 그의 작품 속 페르소나 양조위에 대한 나의 애정과 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P.S. 1.
글 앞에 잔뜩 깔린 사진들은 나의 지극한 팬심으로 촬영된, 넷플릭스 화면을 찍은 사진들이다. 이것을 글 속에 삽입하는 것에 대해서 저작권 위반을 조사해보았는데, 캡처한 사진 정도의 콘텐츠를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이상 문제 될 것은 없겠다는 것을 확인했다. 개인적 감상을 적은 내 글이 상업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은 극히 드물겠으나, 혹시 그리되어 이 사진이 추후 문제의 소지가 될 것으로 판단될 시 지체 없이 삭제할 생각이다. 참고사항으로 최하단에 저작물 관련 조항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분석을 하지 못했다. 즉 영화를 ‘읽어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감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분위기와 짙은 여운만이 남았고 나는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 나의 부족한 이해를 보충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여러 글들을 찾아보았고, 그러한 과정을 토대로 이 글을 쓸 수 있었음을 밝힌다. 좋은 글들을 써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글 주소들은 마찬가지로 최하단에 남겨놓았다.
P.S. 2.
제35조의5(저작물의 공정한 이용)
① 제23조부터 제35조의4까지, 제101조의3부터 제101조의5까지의 경우 외에 저작물의 통상적인 이용 방법과 충돌하지 아니하고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 <개정 2016. 3. 22., 2019. 11. 26.>
② 저작물 이용 행위가 제1항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다음 각 호의 사항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개정 2016. 3. 22.>
1. 이용의 목적 및 성격
2. 저작물의 종류 및 용도
3. 이용된 부분이 저작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중요성
4. 저작물의 이용이 그 저작물의 현재 시장 또는 가치나 잠재적인 시장 또는 가치에 미치는 영향
P.S. 3.
https://blog.naver.com/enna86/222692851104
'방황하며 고뇌하는 홍콩 시민들의 마음'
https://blog.naver.com/vocalxox/222680720369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왕가위 감독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189439&memberNo=11702619&vType=VERTIC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