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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 김훈 - 리뷰

앞뒤 글로 엿볼 수 있는 한 예술가의 도모와 실패의 흔적

by 오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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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는 두 번의 출간이 되었던 책인가 보다. 그의 책의 서문은 1993년에 쓰였고, 말미의 글은 2009년에 쓰였다. 1993년에 글을 쓴 김훈과 그 글을 2009년에 다시 들여다본 김훈. 그는 자신의 문장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지레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그동안 글을 놓지 않고 쉼 없이 치열했었던 이 '한국어 예술가'는 어떻게 변했을까. '서문'과 '개정판을 내며'를 살펴보고, 조금의 비루한 감상을 남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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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언어는 마치 쑥과 마늘의 동굴 속에 들어앉은 짐승의 울음처럼 아득히 우원하여 세계의 계면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이 세계가 그 우원한 언어의 외곽 너머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내 생애의 불우의 풍경이다.


나는 모든 일출과 모든 일몰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 속에 내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어들여 내 속으로 밀어 넣어주기를 바랐다. 말들은 좀체로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에 묶어내는 몇 줄의 영세한 문장들은 말을 듣지 않는 말들의 투정의 기록이다. 아마도 나는 풍경과 상처 사이에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미망을 벗어던져야 할 터이다. 그리고 그 미망 속에서 나는 한 줄 한 줄의 문장을 쓸 터이다.


벗들아, 나는 여전히 삼인칭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세계의 풍경을 상처로부터 격절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삼인칭의 선택 속으로, 객관화된 세계 속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일인칭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마도 오래오래 그러하리라.


1993년 가을에

김훈은 겨우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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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을 내며


오래 전에 쓴 글이다.

여기에 묶인 글을 쓰던 시절에 나는 언어를 물감처럼 주물러서 내 사유의 무늬를 그리려 했다.

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없었던 색을 빚어내듯이 나는 이미지와 사유가 서로 스며서 태어나는 새로운 언어를 도모하였다.

몸의 호흡과 글의 리듬이 서로 엉기고, 외계의 사물이 내면의 언어에 실려서 빚어지는 새로운 풍경을 나는 그리고 싶었다. 그 모색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으로 여기에 남아 있다.

나는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는다. 나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려 한다.

그러하되, 여기에 묶은 글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오지의 풍경을 보여준다.


2009년 가을 김훈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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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정도의 생각을 하며 서문을 읽는다, 그러고 나서 힘겹게 본문을 읽어낸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풍경과 거기에서 떠올라 흘러간 그의 사유의 흔적과 그것을 기록한 문장들을 어떻게든 따라가 보려고 용을 써보지만 이내 실패한다. "작가란 다 이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좌절을 한다. 그러나 곧이어 이러한 문장을 써낸 그에게 또다시 경외감을 품는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을 반복하며 마지막까지 다 읽어내고, '개정판을 내며'를 읽고서 책을 덮고 나면 많은 생각이 든다.

'서문'이 쓰인 1993년 김훈이 품었던 생각과, 2009년 김훈의 그것은 애써 비교하지 않아도 많은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고 이내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는 '한국어'로 이뤄진 글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예술 도구인 그 '한국어'로 포부를 이뤄보고자 했던 꿈 꾸는 도전자였고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 혁명은 여느 것들과 다를 것 없이 성공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고, 그때의 혁명의 시도들은 하나의 흔적이 되어 책으로 남아있다가 개정판을 내야 하는 작가의 앞에 다시 당도했다. 어느 젊은 예술가의 당찬 포부와 이상.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했었던 자신의 젊은 날의 노력,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낀 어떤 한계와 좌절.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을 다시 내면서 새로운 글 한 꼭지를 더 추가해야 했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고 부끄러웠을까, 그리웠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그의 '도모'는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흔적이 되었고, '풍경과 상처'를 이루며 남아있다. 새로운 언어를 추구했었던 서문 속 그와는 다르게, 2009년 당시 현재의 그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새로운 언어를 추구했던 시절의 김훈이 썼던 글이며, 그의 마음이 끝내 개척하지 못했던 '마음속 오지'를 바라보았던 시선들의 모음이다. 그 시선 끝에는 '내 마음속 오지의 풍경'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끝내 개척하지 못하고 미완의 오지로 남아 있는 그 어느 풍경'이다.

글을 읽어가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게 쉽지는 않았다. 유난히 어렵고 복잡하고 꼬여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개정판을 내며'를 읽고 나니 이해가 됐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책은 실험적인 정신을 떠안은 문장들로 이뤄진 책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가는 반항아다. 동시에 비판자이고 혁명가이다. 모든 신성은 그 시대의 기성과 구태를 비판하고 깨부수려 달려든다. 그렇게 수많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서 세상은 구축되고 이어 재구축되어 왔음을 우리는 역사와 문예사조를 통해서 알고 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언어(한국어)를 다루는'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포부와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파고들고 고통스러워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 갔던 원고의 모음이 바로 이 '풍경과 상처'일 것이다. 젊은 날의 치열한 고뇌와 고통이 스민 문장들이었으니 읽어내는 내 마음이 편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모든 예술가는 모험을 즐기는 도전자이다. 그러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제자리에 머물러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예술가 일 수 없고 다만 기술자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가'였고, '언어'로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말들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그의 시도는 미완의 흔적으로 책으로 남았다. 나는 그 흔적들을 열심히 쫓아가 보려 했으나, 끝내 오지를 헤치고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의 뒤꽁무니조차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 역시 어떤 실패를 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실패였다.

과거 책 속 내용을 훑어내기에 급급했던 나는 이제 책 바깥의 상황이 궁금해진다. '소설 작품'을 써낸 김훈이라는 사람이 작품 바깥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작품(소설) 밖의 그의 행적(산문집)을 쫓아 생각을 엿보고 그것들을 내 속에도 한 번 담아보려고 한다. 나의 콘텐츠 감상 태도가 조금은 변하고 있다. 그런 변화가 나는 만족스럽다. 같은 맥락일까, 이제 나는 오늘날의 김훈이 궁금하다. '개정판을 내며' 이후 1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그는 어떠할까. 그의 현재를 들춰보고 싶고, 그리하여 나는 '하얼빈'을 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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