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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 수기 / 1-1(번외)

by 오달피

다른 글을 위해 쓴 아래의 내용을 또 하나의 글로 따로 남겨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녹내장 수기에 번외의 형식으로 따로 남겨둡니다. 전문의 링크는 아래에.


<나는 왜 이렇게 되었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살면서 참 많이도 듣는, 그래서 이제는 어떤 지긋지긋함과 피곤함마저 느끼게 하는 이 문장에서 나는, '사회적이다'라는 말이 '비슷하고 공통점을 갖고 있다.'라는 말로 들리고, 더 나아가 '그렇지 못하다면 함께 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사회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까. 아마도 첫 시작은 ‘질병’이었던 것 같다. 나를 관행적 행로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스스로 남들과 다르다 생각하게 하며 계속해서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고 도망쳐 멀어지게 만들었던 삶. 이윽고 끊임없이 내가 남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살아가게끔 나를 프로그래밍했던 것.

2008년, 21살의 나는 녹내장 수술을 무사히 잘 마쳤으나 ‘안압 미세 조절’을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을 가 생 눈을 의료용 실로 꿰매었다 풀었다 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당시의 어린 내가 혼자 감당하기엔 참 힘든 일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고시원 방에 돌아와 혼자 누워 불을 끈 채 하염없이 음악만 듣곤 했다. 천장은 어두웠다. 밖은 아직 밝았다. 친구들은 새내기 후배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고, 나는 마취가 풀려 욱신거리는 눈을 견디며 얼른 잠이 들기만을 빌었다. 나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은 달랐다. 세상이 분절된 느낌이 들었다.

우연히 발견해서 천만다행이라던 이 병인데, 지금 내가 체험하고 있는 순간들이 정말 천만다행의 행운을 거머쥔 사람의 것이 맞는지 나는 늘 스스로에게 되물어야만 했다. 내 상황에 대한 나와 남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나에게 “정말 다행이다. 잘됐다.”, 때로는 “축하한다.”라는 말을 연신 건넸다. 극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또 그만큼의 고통과 외로움도 함께 느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다. 모르고 지나쳤다면 언젠가 실명했을 내가 우연히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잘된 일이고 축하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빠져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없이 자꾸만 내 감정 속으로 파고들어 갔었다. 안타깝다.)

군대의 괴로움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절대다수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그러지 못한다. 군대만큼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조금의 힘이라도 되길 바라면서) 나에게 위로의 한 마디씩을 건네주었고, 공감 없는 단순한(그렇다고 당시의 내가 느꼈던) 위로는 나에게 그 어떤 마음의 울림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진심이 진심으로 와닿지 않는 순간에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이것 역시 굉장히 자기감정 중심(우선)적인 사고이다. 걱정 어린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삐뚤어진’ 마음을 나는 이때부터 갖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 말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나의 고통. 15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리 그 고통이나 경험이 보편적이라 해도, 나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때에는 좀 더 낭만적인(그리고 유치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탓에,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 존재가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었었다. (또 그것을 사랑을 통해 실현 가능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환상 가득한 (사랑의) 대상이 실제로 있을 리 없었고, 당연히 그런 사람을 찾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나는 ‘공감받을 수 없는 아픔’을 지닌 사람의 외로움을 꼭 껴안고, 그렇게 한 학기를 버텼다.(혼자서 왜 그리 힘들어했는지, 주위에 좀 기대도 됐을 텐데. 안타깝다.) 그 뒤 신체검사에서 5급이 나와 군 면제를 받았고, 휴학을 했다. (저 감정에서 벗어나 이제는 해방된 내가, 그때 당시의 감정을 지닌 나의 모습을 글로 써서 지켜보고 있으니, 굉장히 안타깝고 또 불쌍하다. 저렇게까지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많은 안타까움이 든다)

녹내장 발견 후 괴로웠던 6개월 끝에, 나는 군대를 가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은 나더러 "6개월 고생하고 2년 군대 안 갔다."며, 나를 '신의 아들'이라며, 부러움에 칭송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고생의 유통기한은 6개월이 아니라 평생이었음을.(친구들은 내가 아직도 안압 관리를 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곤 한다.) 이 질병은 나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에(심장에 매우 가까운 곳에) 고이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언제 터져 나를 해칠지 모른다. 이런 생각에 나는 늘 공포와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다. 이 마음은 잊을만하면 다시 날 찾아와 주기적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주기는 살면서 조금씩 길어졌다. ‘자주’ 힘들었던 게 점차 ‘가끔’ 힘들어져갔다. 이유야 여러 가지일 것이다. 15년이 지나 익숙해진 덕도 있을 것이고, 내가 나이를 먹은 것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이때의 나를 떠올리며 글도 쓸 수가 있다. 참 많이 좋아졌다. 아마,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샛길에서 표류하는 삶의 반복>

그 시절 나는 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다. 우선 21살로 너무 어렸고, 지나치게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했다. 그런 내가 ‘내가 선택해서 나온 결과도 아닌’ 이 힘든 상황을 온전히 내 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면 힘들어도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운명처럼 다가온 녹내장은 ‘관행적인 삶의 행로’(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위에서 착실하게 걸어가던 나를 샛길로 밀어냈다. 샛길로 밀려난 나는 너무 무서웠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살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끝없이 마음에서 피어올랐다. (관행적 행로에 오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언제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야 할지, 돈을 어느 정도 모으고 차를 사고 집을 사고 대출금을 갚아나갈지, 인생의 갈 길에 대한 상세한 지도가 이미 다 그려져 있다. 그저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만 하면 된다.)

내가 서있는 샛길은 미지의 곳이었다. 목적지도 방향도 중계지점도 없었다. 막막했다. (지금은 정반대로 생각이 바뀌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삶이 인간의 본질이고, 그 막막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매뉴얼로 일부러 만들어놓은 게 ‘관행적 행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태어난 목적도 살아갈 방향도 없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매 순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하고 그 결과를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지금의 나는 한결 마음이 가볍다. 이동진이 밝힌 자신의 삶의 모토가 생각난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샛길 위에서 나는 떠돌았다. 갈 길을 찾지 못했다. 어설프게 시작하고 아쉽게 끝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완벽한 표류였다.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내가 표류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던 중에 나는 아빠와의 영원한 작별을 겪었고, 당시의 사건이 내게 준 강렬한 (슬픔의) 힘으로 관행적 행로로의 복귀를 꾀했다. “남들처럼 살아보자. 용기 내서 도전해보자.” 잠시 철이 들었었던 것 같다. 공무원이 되었고,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사는 정주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다시 익숙한 샛길로 돌아왔다.

그곳의 ‘멀쩡한’ 사람들이 나를 받아주었느냐를 판단해보기 전에, 내가 그곳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는 게 중요했다. 특별함이 아니다. 같을 수 없는 슬픔이다. 나는 자신이 '관행적 행로'위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알 필요조차도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차곡차곡 그 길을 무던하게 잘 밟아 가고 있고, 이런 글을 쓸 필요 없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부럽다. 그런 부러움이 커질수록 내 안의 다름은 더욱 선명해지고 나는 그럴 때마다 슬퍼진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

그러나 이제는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듯, 지금 내게 다가온 이 상황들을 나는 어찌할 수 없다. 받아들이고 이 속에서 내가 살 길을 찾아 만들어 가야 할 뿐이다. 여태껏 나는 샛길 위의 삶이 내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잠시 방황하고 머무르다 떠날 곳이라고 여겨 애착을 갖고 가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는 여기에서 평생을 머물러야 할 것 같고, 그러고 싶고 이제는 그러려고 한다. 이제부터는 본격적 내 자리라고 생각하고 애착을 갖고 다듬고 키워낼 것이다. 적극적으로 떠도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 안의 가장 양지바른 곳에다 놓아두고 살 것이다. 그것은 각오라기보다는 어떤 수용에 가깝기에. 흥분보다는 차분함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P.S. 위 글의 전문

https://brunch.co.kr/@odrp39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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