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반지'가 영화로 현신한다면
※영화 서사가 본문에 포함되어 있음.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넘어가시길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변해버린 나'를 만난다는 것>
첫 관람은 2018-2019년도로 추정한다. 공시생일 때였다. 그때 봤던 것과 지금 본 아바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저러저러한 배경에서 저러한 인물이 나와서 저런 스토리로 끝나는구나. 재밌다." 정도에서 파악이 끝났다. 지금은 좀 더 시야가 확장된 느낌이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보였다. 영화는 반복해서 볼 때마다 못 보고 놓친 것들이 추가로 더 보이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단기간에 여러 번 보는 것은 관람의 결과들에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나 역시 헤어질결심을 연거푸 두 번을 봤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냥 좋아서 본 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영화를 다시 볼 때 직전에 본 시간과 텀이 길다면, 영화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 영화를 볼 때의 내 모습과 환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여러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든 바뀌었을 것이다. 첫 번째 영화를 본 나와 두 번째 영화를 본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두 관객의 감상은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를 알면서 내가 변했구나. 어떻게 변했구나. 얼마나 변했구나. 와 같은 것을 느끼면서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다. 즉 첫 번째 관람은 그저 영화 자체의 콘텐츠에 빠져서 즐기는 감상이라면, 두 번째 이상의 (시간차를 둔) 관람은 영화 스크린 뒤에 거울을 놓아두고 자신을 비춰보며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내 모습을 함께 감상하는 관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권세가에서 태어난 혁명가. 출생의 배경과 인물의 성향에 대한 아이러니>
아바타는 문명과 인간의 근대성 합리성 그리고 탐욕에 대해서 자연과 유대 화합 등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정서가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브리스튜디오의 모노노케히메가 생각이 났다. 다른 많은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침입자들이 토착민과 원주민을 쫓아내고 이득을 취하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아이러니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자들의 후손이 일군 영화터(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가, 그들의 선조의 역사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조들이 일궈낸 막강한 자본과 환경의 힘이 아니었다면 아바타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거대 자본과 첨단 기술과 합리성과 근대성을 바탕으로 성장한 영화터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자신의 탄생 배경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었다.
<지구 여행자들의 오버투어리즘>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영향이 아직도 짙게 남아있다. 인간의 삶과 일생은 지구에 잠시 놀러 온 여행자와 같다 // 는 생각이 내 사고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잠시 머물러있다 갈 객의 입장인 손님이 자신을 맞아주고 환대해주는 여행지를 지나치게 훼손해서는 안될 것이다. 손님은 손님의 입장에서 적당히 즐기고 경험하고 떠나야 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노바디 이기 때문이다. 그 적당히가 현재 되고 있지 않은 게 인간이다. 제주도에 공항이 두 개가 왜 필요하고, 아름다운 숲길을 왜 다차선 도로로 만들어야 해서 나무들을 베어내야 하는가. 그곳에 중국인들을 위한 의료타운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공시 공부를 할 때 행정학을 공부했는데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게 기억이 난다. "개발의 논리와 환경보호의 논리가 맞붙으면 어떠한 이유로 개발의 논리가 힘을 얻어 결국 이기고 만다"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결과물은 전 세계 곳곳에 넘쳐난다. 필요를 위한 개발과 침식은 '여행자가 여행을 즐기기 위해 감수해야 할 변화'라고 좋게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행객들의 행동은 도를 넘어섰고, 그 '오버투어리즘'에 의해서 앞으로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올 이 지구는 앞으로 무슨 비극이 일어날지 쉽게 예견이 될 만큼 꽤 많이 훼손돼버렸다.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는 한국에서 50년을 넘기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았다. 신라 천 년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역사다. 그러나 이 대한민국이 천 년 만 년 가고 자신들도 거기서 그만큼 살 것이라고 마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행동한다. 도대체 여기에서 몇 년을 얼마나 살다 가려고 하기에 그렇게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200년 전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늘 언제나 깊게 생각하고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메멘토 모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노바디의 정서. 그리고 노바디가 '우리와 하나'가 되기까지>
인간의 일생을 여행에 비유한다면,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즉 (김영하 여행의 이유의 표현을 빌리면) '노바디'이다. 그들은 한 공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떠나갈 객에 불과하다. 그러나 종종 그러한 손님들이 정착하여 그들과 하나가 되고 동화가 되는 경우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렇게 노바디로 시작하여 하나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우리는 아바타에서 볼 수 있다. 노바디의 정서로 시작해서 그 노바디가 하나의 일원이 되기 까지.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제이크 설리가 그들과 하나가 되고 융화가 되기 위해 어떤 모습과 어떤 행동과 어떤 애티튜드를 취하는지, 그것을 잘 살펴보면 많은 감상 포인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설리는 토르크 막토가 되어 부족 앞에 나타나서도 결코 자신이 구세주 영웅인 것처럼 앞에 나서서 행세하지 않았다. 쯔테이의 권위를 살려주었고, 자신이 진정 구원자의 역할을 할지언정, 부족 내에서의 쯔테이의 위치를 깎아내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오르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들의 문화와 행동양식을 철저히 따랐으며, 그들과 외면(외양, 행동방식, 습관)부터 단일화하고자 했다. 갑자기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역사와 우리를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만행이 생각나는 것은 다소 과하게 나아간 발상이겠으나 엄연한 대한민국의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내가 '오버했다'라고 말하고 사과하지는 않겠다.
<근대성과 합리성과의 작별. 이제는 우연과 불확실의 시대>
미국은 그 자리에 살던 원주민들을 총칼로 밀어내고 지배하고 씨를 말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미국을 세웠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힘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 그들은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지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근대성과 합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은 베트남전을 승리하지 못했다. 힘과 자본과 숫자로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미국의 근대성과 합리성은 베트남전을 직후로 산산조각이 나고 부서져버린다. 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 포레스트검프 등을 보면 그런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굳이 미국 하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손쉽게 찢어발길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져나갔다. 헤게모니가 바뀌고 있다. 인간이 자신들의 얄팍한 두뇌, 지성, 문명으로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했던 근대성과 합리성, 그 두 가지의 '성질'이 지배하던 모더니즘의 시대는 이제 '정말' 막을 내렸다. 세상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되었고, 세상은 우연과 불합리와 사건 사고가 지배하는 예측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세상의 이치를 인간들이 뒤늦게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우월함(이라고 착각한 판단 착오)'에 취해있느라. 노력과 기획으로 터트리던 정형화된 공식만이 지배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나는 EXID가 직캠으로 순식간에 유명세를 얻었던 에피소드를 아직도 기억한다. 가까이는 브레이브걸스 에피소드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정형화된 공식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아주 작은 하나의 우연'의 공식 역시 존재한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모두 다 휘두를 수 있고 그것이 언제까지고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오만한 태도가 아닐지.
<네이트리로 보는 사랑의 모습과 형태>
요즘에는 사랑의 모습, 형태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최근에 봤던 셰이프 오브 워터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그냥 생각을 자연히 많이 하게 되는 주제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설리와 네이트리의 사랑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마지막에 인간 설리와 나비족 네이트리의 '나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는 참 감동적이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당신을(당신의 영혼을) 봅니다.' 많은 것들을 곱씹고 생각하고 풀어낼 수 있는 말이다. 마음과 영혼과 유대와 화합과 네트워크와 협동을 상징하는 나비족과 그것들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에이와 앞에서의 모두가 이어진 형태의 의식. 설리를 부족으로 받아들일 때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려 모두가 하나로 이어지는 모습 등) 것들도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다시 사랑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나는 네이트리 자체의 사랑의 행동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설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하며 보호하고 아끼려 하는, 마치 '모성애'를 연상케 하는 네이트리의 행동과 모습과 표정에서 나는 왜 혼자 감동해서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날 뻔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었나? 그렇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 내가 그렇게 혼자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애를 할 때에도 나는 너무 나 혼자의 마음으로 지내려 했나? 아니면 사랑을 하면서 홀대를 받았나? 무엇이 사실이고 공상인지 구분은 불명확하지만 그중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네이트리와 같은 사랑의 모습과 행동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현재 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는 확실하다 말할 수 있겠다.
<'진짜 나'는 무엇인가. >
설리는 아바타에 링크를 하면서 점차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아바타로 있는 자신이 마치 진짜 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호접지몽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전히 본체는 제이크 설리이다. 링크가 끊기면 아바타는 영혼 없는 시체가 되고, 링크 중인 설리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 아바타 역시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렇듯 본체와 부체가 확실한데도 그 둘 사이에서 무엇이 진짜 내 모습인지 이성적으로는 판단하지만 감정적으로 혼란을 겪는 일들이 많이 나온다. 바람의나라 4성 문주였던 어떤 이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밑에서 지도를 받고 신체적 자유와 활동의 자유를 강제당하지만, 게임에 접속하면 수백 명의 문파원들이 자신의 통솔과 지도를 따르는 '빅리더'가 된다. 두 가지의 자아 중에서 어느 쪽의 자아에 더 끌리고 매력을 느낄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게임을 하는 나'가 진짜 본체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에서 움직이는 '나의 캐릭터'가 진짜 내 모습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아니 속마음은 "그랬으면 좋겠다."인 게 맞을 것이다.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본캐의 이동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영화의 최고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설리는 결국 아바타로 영혼의 이동을 완성한다. 육신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나'로 탄생한 것이다. 이 부분은 많은 점을 생각해보게 한다.
<깊이와 넓이가 완벽한 영화>
2009년에 나온 영화 한 편을 보고 집에 돌아와 생각나는 대로 끄적였는데 이렇게 많은 글이 나왔다. 아바타는 그저 단순히 재미있는 오락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엄청난 오락성으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러면서도 아바타는 또 쪼개고 분해해서 씹고 뜯어보면 무한한 생각 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아주 깊이 있고 철학적인'영화이기도 하다. 문명, 역사, 사랑, 인간의 정체성, 문예사조 등 정말 많은 부분에서 건드릴 게 넘쳐나는 영화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씹고 뜯고 맛볼 거리를 갖춰놓고서도, 그따위 것들에 전혀 관심 없는 '절대다수 대중들'의 마음까지 완벽하게 잡아내버렸다. '아바타를 만든' 제임스 카메론은 정말 신인가? 명절 특수를 노리고 적당히 버무린 작정한 오락영화보다 아바타가 만 배는 재밌다. 엄청나게 훌륭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각 잡고 만든 영화보다도 아바타가 생각할 거리가 훨씬 더 많다. 이런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갖춘 영화는 과연 몇이나 될까. 불현듯 머릿속에서 다크나이트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다크나이트 조차도 아바타보다 더욱 깊이 있는, 건드릴 부분이 많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바타는 영화의 아주 이상적인 하나의 롤모델을 2009년에 새롭게 정립했다. '절대다수 대중이 미쳐 빠질 만한 오락성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필요한 사람은 필요한 만큼 다 찾아볼 수 있는 철학적 깊이와 메시지들을 집어넣을 것. 이 두 가지의 밸런스를 기가 막히게 맞춰서 모든 전 세계 사람들이 보고서 만족할만한 작품을 만들 것'. 대부분의 영화는 상업영화다. 박찬욱 감독은 파이아키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예술영화를 하는 감독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듯 영화의 절대다수는 상업영화이고, 그렇다는 말은 "(거의) 모든 영화는 대중의 일차원적인 욕구(오락성, 재미)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을 갖고 있다"라고 볼 수도 있다. 아바타는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족시킨 '절대 영화'라고도 과하게 표현을 할 수 있겠다. 기쁜 것은 이 영화가 5편까지 나올 예정이라는 것이다. 샘워싱턴의 프로필을 보면 나오지도 않은 2027년의 아바타5가 필모에 벌써 올라와 있다. 2027년이라는 시점은 뒤로 한없이 미뤄질 수도 있겠지만 아바타5로 예정된 남은 편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아바타가 5편까지 무사히 개봉해서 이 엄청나게 멋진 불세출의 유니버스가 집대성이 되기 전에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배우나 감독의 사망이라던지, 영화사의 붕괴라던지 등의 것들과 같은 우연적인 요소들 말이다.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우연과 불확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므로 어찌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팬의 입장에서는 그저 소망할 뿐이다. 리버피닉스와 제임스딘은 너무 빨리 죽었다. 히스레져 역시 마찬가지. 또 알베르 카뮈는 그의 거대한 세상을 예고편만 보여준 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아바타 히스토리에서는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P.S.
1) 아바타가 5편까지의 대장정에서 남은 후속작들이 혹여나 1과 같은 재미와 퀄리티에 미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팬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쿠키를 확인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괜한 걱정이 될 확률이 아주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눈으로 확인한 선에서는, 2편도 '죽여줄 것'같다.
2) 2009년에 나온 영화인데 촌스러움이 단 1도 묻어있지 않다. 이로써 "정말 잘 만든 영화는 시간의 풍화에도 굳건하며 결코 때 타서 촌스러워지지 않는다"는 게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3) 이 글의 아주 많은 부분과 핵심 통찰은 김영하의 글들에서 아주 많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영향을 받았음을 밝힘. 특히나 현재 그의 책 '여행의 이유'를 읽은 직후이고 그 책에서 몹시도 많은 감동을 받았기에 이 글 속에서 그 책의 흔적을 아주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