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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Oct 20. 2019

<조커, Joker 2019>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황금사자상을 획득한 이 영화는 MCU나 DC가 만든 히어로물과는 아주 달랐다. 아니, <조커>는 히어로물이라고 불릴 수 없고 불려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몰락한-혹은 부패돼버린-사회 시스템에서 나온 한 기형적인 인물을 다루고 있고, 또 그 기형적인 인물을 다루는 사회의 모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도 주인공인 아서의 폭력을 미화하거나 두둔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그가 속한 고담에서‘빌런으로 재탄생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따라서 <조커>는 버림받고 고독한 남자가 광대 자경단의 우두머리 격으로 되었는가에 포커스는 맞추면 안 된다. 대신, 개인의 고통과 사회의 환경이 어떻게 결합되면(혹은 어긋나면) 파멸에 까지 이룰 수 있었나, 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 그 속에는 결국 계급 문제와 복지 문제도 끼어들어가고, 시스템을 이루는 사람들 간의 관계 문제도 담겨있다. 


러닝타임 초반 아서의 삶은 비참하다. 광고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뚜드려 맞지만 되려 사장은 그를 의심하며 광고판 값을 다음 달 월급에서 제한다고 말한다. 그의 노모는 고담시 시장으로 출마한다는 백만장자 토마스 웨인의 집에서 30년 전에 일을 했다는 이유로 지금의 삶에서 그들의 구원해줄 방도로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은 없다. 그는 낡은 엘리베이터로 가동되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코미디언이 되기를 꿈꾸지만 그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그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오는 머레이를 존경한다. 언젠가는 저런 쇼에 출연하고 싶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크로서 재미를 선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료가 준 권총을 들고 병원에 아이들을 웃기러 갔던 날 실수로 총을 떨어뜨리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그는 해고를 통보받는다.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세 남자. 그들은 병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아서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패기 시작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고, 자신보다 약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결국 그의 분노가 폭발하고 아서는 살인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 후 그의 행동은 사뭇 다르다.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이를 어쩌지 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 대신에 화장실에 들어가 무언의 춤사위를 시작한다. 



그 사건 이후, 언론매체는 살인사건을 개인의 문제 대신 사회의 문제로 치환한다. 물론, 언론의 분석이 틀렸던 것은 아니다. 고담시에는 아서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들어주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단정된 말로 결론 내어버리는 그 사회의 풍조는 분명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아서가 지하철에서 살인을 저지른 기저 중 하나일 뿐이다. 나중에 아서가 <머레이 쇼>에 출연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그가 그들은 죽인 건 그들이 아서에게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며, 아서가 처음부터 광대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살인을 한 것은 아니다. 


살인 이후 아서는 스탠팅 코미디를 나가고, 같은 아파트 이웃인 여자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잠깐의 즐거움이 이루어지는 듯 하지만 아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토마스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또 한 번 놀란다. 바로 그가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는 것. 엄마의 말에 따르면 30년 전 가정부로 일할 때 밀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서는 토마스 웨인의 대저택을 찾아가지만 그의 시종에게 ‘너희 엄마가 미친 거다.’라는 말을 듣고 또다시 낙담한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설상가상으로 그가 지원을 받고 있던 정부의 정신과 클리닉도 문을 닫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마저 지하철 살인사건을 취재하러 온 형사들의 말을 듣고 쓰러지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병원 장면이 결정적이다. 자신이 그토록 나가고 싶었던 머레이 쇼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회자 머레이가 자신의 영상을 보고 웃는다. 거기에서 그는 더 이상 이성적인 해결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특정인에게 듣는 멸시보다 자신이 믿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돌아온 멸시에 대한 상처는 훨씬 크다. 


그래서 아서는 그 상처를 마지막으로 치유받기 위해 토마스 웨인을 직접 만나러 간다. 하지만 직접 만난 토마스도 그의 어머니를 과대망상증이 있는 미친 여자라 말하고 너(아서)는 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너는 입양됐으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그리고 한 번 더 내 아들(브루스 웨인)에게 가다 가면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그리고 아서는 아캄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파일을 읽고, 토마스 웨인이 말한 것들이 병원 파일에도 적혀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과대망상에 빠져왔다는 것도 확인한다. (이웃 여자와의 관계가 모두 망상이었던 것)



자, 이제 아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의 절망과 고통은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보인다. 엄마는 과대망상증 환자에 미친 여자고, 아들을 폭력으로부터 방관했다. 심지어 나(아서)는 입양된 아이다. 하지만 새엄마의 과대망상증은 이어받았고, 환상 속의 사랑도 이제는 증발해버렸다. 직장에서는 내 쫓겼고,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담긴 비디오가 유출된 이상 스탠딩 코미디 쪽에서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어 보인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남아있는 분노를 노출하는 것이다.


마침 머레이 쇼에서 자신을 불렀다. 아서의 ‘노잼’ 영상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고, 쇼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아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다. 하지만 그때 그의 표정은 영화 초반 머레이 쇼에서 웃음을 지었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머레이 쇼에서 인터뷰를 한 장면은 그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분장을 시작한다. 매체에서 떠들어댔던 광대 자경단의 바로 그 분장이며, 기득권 층을 상대로 시위하는 사람들이 쓰고 나오는 마스크의 분장이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옛 동료 두 명이 그를 방문한다. 그중엔 그에게 총을 건네 준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는 이도 있다. 자신이 직장을 잃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그를 향해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 그가 줬던 총이 아닌, 자신이 분장을 할 때 쓰는 예리한 가위로. 다른 한 명인 난쟁이 친구는 오열한다. 아서는 그래도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너뿐이었다며 그를 보내주지만, 그는 작은 키로 인해 아파트 문의 잠금장치를 풀지 못한다. 아서는 웃고, 그의 이마의 키스를 하면서 문을 열어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광란의 춤사위가 시작되고, 그것은 이제 아서가 그의 감정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브루스가 우물에 빠졌을 때 다시 우물 위로 올라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조커>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있는 분노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아서의 그 분노는 고담시의 있는 많은 사람들 (중하위 계급)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아서의 살인이 우발적이고 개인적이었지만, 미디어가 그것을 설명해주고 오히려 확장시킴으로써 그 살인은 의미를 갖고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여기서 나는 얼마 전에 진범이 잡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생각났다. 사람이 죽었고, 언론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떠들어댔다. 어쩌면, 범인은 매스컴을 통해 자신이 유명해졌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가적인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라 당연히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아서도, 미디어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줬기 때문에 머레이 쇼에 나오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결국 설전 끝에 머레이 역시 죽여버린다. 이제 모두가 그가 살인자라는 것을 안다. 지하철에서의 살인이 도화선이었다면, 스튜디오에서의 살인은 불을 확산시키는 행위이다. 이제 더 이상 <머레이 쇼>를 사랑하고 나오고 싶어 했던 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쇼 역시 자신을 멸시하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아서에게 <머레이 쇼> 역시 파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광대 분장을 한 그가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그의 살인행위는 프레임 안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바뀐다. 개인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 것이 사회에 대한 분노로 확장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제 거리에는 광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킨다. 아서가 연행되던 경찰차는 광대가 운전하는 앰뷸런스에 의해 파괴된다. 이제 성난 시민들이 그를 일으키고 환호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는 ‘히어로’로 비친다. 그리고 같은 시간, 토마스 웨인이 총에 맞아 죽는다. <베트맨> 시리즈에서 브루스에게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조커>에서는 그 순간이 이 전의 배트맨 영화들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토마스 웨인의 죽음이 머레이나 그의 회사에 속했던 직원 3명의 죽음처럼 아쉬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신화적으로 본다면, 이렇게 또 하나의 ‘아버지 죽이기’가 이루어진다. 정말로 토마스가 아서의 아버지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담시에서는 믿을 것은 별로 없다. 새엄마의 말이 사실인지, 병원 자료에 적힌 말이 사실인지, 토마스의 말이 실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대신, (서류상) 아서는 입양됐지만, 마치 유전처럼 과대망상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은 순간 웃음을 잊어버리고, 광기를 표출한다. 그가 내뿜은 분노가 점점 커져서 결국엔 그의 근원일지도 모르는 토마스 웨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나. 



그래서 결국 나는 <조커>는 DC코믹스의 ‘고담시’와 ‘조커’라는 캐릭터만 빌려 만든 사회비판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밝혔듯이, 이 영화가 가장 많이 오마쥬 한 것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가 아닌가. (재밌게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로버트 드 니로가 <조커>에서 머레이로 나온다.) 그래서 결국 영화의 주제의식이나 서사도 <택시 드라이버>를 따라간다. <조커>에서 아서는 굳이 광대일 필요가 없었다. 그 사회에서 하층 계급으로 생각되는 다른 직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커와 광대라는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그리고 강렬한 도구를 택함으로써 영화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것은 그래, 미친 사회에서는 폭력만이 답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회가 저 지경에 닿기 전에 멈출 수 있는지 그 안전장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대하는 풍토가 마련됐다면? 아서가 안정적으로 심리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면? 사장이 아서의 말을 믿고, 그를 두들겨 팬 학생들을 찾아 광고비 값을 물었다면? 


미국에서는 <조커> 영화 관람 전에 범죄를 막기 위해 경비를 늘렸다고 한다. 이전에 <다크 나이트> 이후 총기사건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과잉대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범죄를 일으킨다는 것은 너무나 쉽게 다른 곳으로 탓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에 한국에서 만화산업을 죽이고, 현재에 이르러 게임산업을 청소년 범죄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한편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미디어는 어떤 사실이나 진실을 찾고 파헤치는 것보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끈 뒤 선동하는 일에 더 능숙한 것 같다. 일반 사람들은 TV나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을 믿기 쉽다. 미디어가 올바르다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끊임없이 확인되지 않은 의혹과 가십들로 뉴스를 만드는 현재의 미디어를 생각해보면, 이는 아주 위험한 일이다. 이런 미디어의 뒤에서 어떠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들만 내보내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또는 나누기 위한 행동을 한다면 그 도시, 혹은 나라도 ‘고담’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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