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ilmKart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ripza May 09. 2022

전주의 전주 : 1일 차

전주 국제영화제 방문 뒤 후일담

기차를 타고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수원과 전주는 KTX로 이어지지 않았고 편도로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래서 결국 전날 기차표를 취소하고 차를 몰고 두 시간을 달렸다. 일요일 오후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길은 막히지 않았다. 가면서 닭장차를 봤는데, (거의) 모든 닭들이 머리를 철창 밖으로 내놓고 있었고, 하마터면 전방주시를 하지 못할 뻔했다. 


내가 축제를 마지막으로 경험한 건 언제였을까. 16년 말과 17년 초에 광화문도 축제라면 축제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2010년 하이델베르크에서였다. 주말에 열린 마을 축제에서 맥주와 소시지 세트가 단돈 2000원이어서, 허겁지겁 그것들을 사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시절을 거쳐오면서 축제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질 찰나에,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건 한동안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전주 영화의 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이는 영화제를 즐기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바로 들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여기 사는 젊은 사람들 같았다. 이 두 그룹은 오묘하게 섞이며 거리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영화 이야기 : 오늘은 영화 두 개를 봤다. 오후에 도착한 탓에 체크아웃을 세 시에 했고 (비즈니스 호텔이었고, 규모가 크지 않아 주차 대수가 30대였는데 처음에 자리가 없어 다른 건물에 종일권을 구매했다가, 첫 번째 영화가 끝나고 잠시 돌아왔을 때 자리가 빈 것을 보고 얼른 차를 옮겼다.) 다섯 시 반에 하나 / 아홉 시에 하나를 봤다. 둘 다 좋았다. 



17:30~ <아슬란을 찾아서> 별 세 개 반

노르웨이 감독의 영화. 한 집에 살고, 연인처럼 보이는 두 여자가 나온다. 한 명은 기자가 직업이고, 한 명은 목수 같다. 카메라의 시점이 늘 올곧게 멈춰있다.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반복되는 동네의 풍경이 나오고, 주인공들이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가끔은 고양이가 나오고 (감독의 말처럼) 그 장면은 늘 영화에 도움이 된다. 영어 제목은 in human position. 기자로 일하는 여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노르웨이로 난민 신분으로 온 뒤 10년 동안 지낸 사람의 행적을 조사한다. 그는 어딘가에서 본인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취업비자 비슷한 것을 받고 한 회사에서 일했지만, 그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그 기간 동안 일한 것이 불법으로 벌금이 매겨지고 추방당할 위기에 놓여있다. 영화 내용은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다. 사연이 구체화될수록 '난민'이라는 전체 집단보다 '아슬란'이라는 가상의 인물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아슬란이라는 이름만 볼 수 있고, 그의 모습은 알 수 없다. 



한편, 영화에서는 의자가 끊임없이 나온다. 작중 인물의 손에 해체되기도 하고, 고쳐지기도 한다. 사포질로 재구성되기도 하고 또한 누군가가 끊임없이 앉고, 혹은 자리가 비워져 있을 때도 있다. 어쩌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난민'이나 '복지'와 관련이 있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의자라는 사물이 주는 '안정감'때문이었다. 처음 이케아를 갔을 때, 스웨덴이라는 북유럽에 있는 나라의 의자들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숲이 많아서 목재가 많이 나오나?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수많은 의자 종류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름도 제각각이고, A위에 동그라미가 새겨진 문자(과학에서는 '옹스트롱'이라는 10^-10라는 길이을 표현 한다.)를 접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북유럽에서 만들어진 가구를 보면 안락하고 앉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사람은 언제 안정감을 느낄까? 바로 자신의 자리가 있을 때가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난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나라에서 빠져나와 타국에 와서, 자신 몸 하나 뉘 울 자리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위안이다. 복지시스템도 그렇다. 은퇴하고 나이가 먹어서도 일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인간 다운 삶을 계속 영위해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하지만 사람은 일을 할 때도 곧 잘 앉곤 한다. 컴퓨터를 다룰 때, 혹은 무언가를 세심히 살펴야 할 때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 그럴 때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긴 하다. 의자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한숨을 쉬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혹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 어딘가에 앉기도 한다.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앉는다. 


영화가 끝난 후 GV에서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노르웨이의 복지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난민과 관련된 정책을 보면 너무나 복잡하다. 그런 것들은 때론 현지인들에게도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혹시나 조그마한 잘못이라고 하게 되면 사람을 추방하게 위해서는 아닐까,라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두 사람은 그들이 원하던 의자에서 서로의 몸을 의지한다. 의자는 그 둘은 충분히 지탱한다. 매우 안정적이다. 모두에게 의자가 필요한 시간이다.



21:00~ <천안문의 망명자들> 별 네 개 반

크리스티안 초이라는 사람을 비롯한 참된 중국인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왜 왔는지 / 중국을 왜 떠나왔는지? 그 이유는 거창하지 않을 수 있다. 바랬던 것이 없는 게 부지기수니까. 어쨌든 그녀는 14살이 떠나왔고 결국 이 다큐멘터리 때문에 천안문 사건으로 망명된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밌는 건 그녀가 미국에 오래 살아서 그때 당시엔 (89년 6월) 그 사건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망명자들을 배신한 서구와 그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그냥 잘 되겠지. 중국이 알아서 더 하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미국은 대중국에 대한 위험에 직면해있는 걸지도 모른다.


트럼프와 클린턴이 중국 주석과 손을 흔드며 웃음을 짓는다. 망명자와 그녀의 얼굴은 찌푸려진다.


그녀는 89년의 그들을 찍고 또 찍었다. 필름값이 거덜 날 때까지. 하지만 그것은 완성되지 못했다. 


한 국가가 국가다운 역할을 하려면 어째야 할까. 자국민을 행해 총구를 들이밀고 총을 쏘는 그런 나라. 공교롭게도 89년의 천안문과 80년의 광주가 떠오르고, 내가 또 모르는 숱한 같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독재와 전체주의도 위험하지만 그것을 견제하지 못하는 민주주의도 위험하다. 편안한 민주주의에 빠져 뒤를 돌아보지 않는 상황도 위험하다. 견제가 없어진 민주주의는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사람을 그저 지지율과 투표율과 득표율로만 판단하고 행동한다.


30년도 더 전에 망명당한 자들은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다. 수배자에서 기피자가 된다. 당당히 대사관으로 가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는다.



악플보다 나쁜 건 무플이라고. 그렇게 중국은 천안문 사건을 은폐하고 검열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한다. 아는 이도 침묵하고, 모르는 이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이 악행은 시간이라는 친구를 얻어 지하 저 아래로 사라져 버리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음 세대의 거름으로 작용한다. 이제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을 모른다. 알아도 말하지 못한다. 그런 풍토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료이자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총알은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건 그 사료를 뿌릴 땅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과 가까운 전주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사실이 좋다.)


시간의 힘이란 무섭다. 젊은 사람들이 별안간 변해있다. 21살의 청년은 이제 배가 나온 중년이 되어있고, 왕성한 학자와 기업가는 흰머리가 가득한 노인이 되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현재로 올수록 사람들은 많은 정보를 얻지만 만대로, 정보에 휘둘리기도 쉽다. 우민화만 잘 되어 있가면 독재국가로 가는 길은 여느 때보다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혹은 다큐)는 이런 일도 해야 한다. 오락을 줄 수도 있지만, 입에 꺼내기 힘들고 글로 써 내려가기 힘든 것들은 영상언어로 풀고, 그것을 퍼뜨려야 한다. 그래서 방식이 중요하다, 사람은 사람과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이야기들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만연한 차별과 갈라 치기 뉴스 그리고 선택적 정의와 기득권에 오만함에 질리는 요즘이다. 그래서 5월 10일 이후의 일들이 걱정된다. 그래서 급진적으로 얘기해야 한다. (영화에 나온 말처럼) 앉아서 펜대나 굴리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 실제론 지금 나서야 할 때일지도. 광화문이 또 다른 천안문이 되지 않기를 빈다.


1일 차 끝

매거진의 이전글 <패러랠 마더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