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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Jun 04. 2022

전주의 전주 : 2일 차

다만 이제 더 이상 전주가 아니어버린

원래는 전주를 간 뒤 그 다음주에 연작으로 올리려고 했으나, 이사와 출국 준비 등을 하는 바람에 늦어버린 2일차의 이야기. 


이 날은 영화 두 개를 봤고, 가장 알차게 지냈다. 오전에는 <보일링 포인트>라는 영국 영화를 봤고, 점심에는 영진위에 다니는 D를 만났다. 영화계에 종사하니 이런 국내 영화제에 그는 관객이 아닌 또 다른 포지션으로 방문을 해야 했고, (약간은 부럽게) 기자 신분, 혹은 관계자 신분으로 무료표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터미널까지 시간이 애매해서 우연히 들어간 양식집은 굉장히 맛있었고, 다만 반주를 하지 못해서 안타까웠을 뿐이다. 



이제는 회사 동기에게 판 아이오닉하이브리드를 타고 그를 터미널에 내려다주고, 차를 가지고 나온 틈에 영화의 거리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문화 공간에 가서, 100Movie, 100Poster를 둘러보았다. 사실, 전날 전주에 와서 어떤 이벤트가 있는지 살펴보았을 때는 거리도 멀고, 포스터만 전시해놓은 터라 재미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분 남짓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려 수도권보다 훨씬 산 가격에 주유도 하고 세차도 할 수 있었다. 


하여튼, 포스터를 전시해놓은 곳에서 나는 여러가지 굿즈를 샀는데 1) 100개의 포스터가 미니미스티커 버젼으로 들어가 있는 번들 2) 내가 이미 감명깊게 본 영화와, 디지인이 맘에 들었던 영화의 대형 사이즈 포스터 몇 장 3) 전주국제영화제 컨셉으로 만들어진 펜(이것은 뮌헨 입국 시에 사용할 것이다.)과 텀블벅(이것 또한 외국에서 카페를 가면 사용할 것이다.)를 사고 양손 가득 나왔더랬다. 


다시 시내를 돌아와서는 <붉은 별>이라는 아르헨티나 감독이 만든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 감상에 대한 내용은 후술할 예정이니 넘기고, 어쨌든 다시 밖으로 나와 이번엔 숙소 근처에 있는 우동가게에 가서 맛있는 우동 한 그릇을 먹었다. 마제소바 같이 찐덕한 소스와 비벼먹는 맛이 너무 좋았다. 가만히 보면, 전주에는 일식집이 굉장히 많았다. 전주에 처음 도착해서 골목에서 먹었던 메밀소바도 그렇고, 찾아만 놓고 못간 스시집과 덮밥집도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서는 휴식을 취하고 곧 나올 시집에 대한 작업을 하다가 밤 열 시 쯤 다시 나와 이자카야를 갔다. 이로써 이자카야가 홀로 방문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 추가됐다. 

오코노미야끼 하나를 시키고, 하이볼 한 잔과 아사히 맥주 한 잔을 마시며 그날 본 영화에 대한 감상을 그제야 핸드폰에 써내려갔다. 매장안은 대학생들로 가득차 있었고 젊은(나도 아직은 그럴까..) 사람들의 약간은 허세가 섞인 술자리 썰을 들으며 속으로만 웃었다. 술집을 들어갈 땐 '몇 시 까지 하세요?'라고 물어봐놓고 정작 나온건 밤 열한시 반이여서... 이런 방면으로는 내가 허세를 부렸다라고도 할 수 있다. 




오전의 영화 <보일링 포인트> 감상 [스포일러 있음]



<1917>이후 오랜만에 원 컷으로 '보이는'영화를 보았다. 아, 실은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헐리우드 대작전>이 있긴 했다. 이 영화는 런던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크리스마스 전날에 펼쳐지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식당에는 (이렇게나) 많은 직원/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일을 벌이며 살아가고, 다른 의미의 전쟁터(마치 1917처럼)를 다룬다. 


<1917>얘기를 자꾸 하는데, 마지막으로만 언급한다면 두 명 혹은 한 명이 나오면서 계속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진행되고 이어진다. 물론, 주요 주인공은 주인공인 수석쉐프지만 말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입장이 고려되는 것이 재밌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들 /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사람들 /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들 / 쓰레기를 버리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그 자리에서 보이는 서로에 대한 푸념이 보였다. (마치 회사에서의 모습처럼...) 화를 내고, 어떤 일에 대해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건'에 대해 말하고, 또 서로에게 지금의 기분에 대해 물어보고. 결국엔 어떤 일은 결국 돌고돌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끊는 점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셰프란 직업은 '화를 내는 직업인가?'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고든 램지, 이선균(씨가 연기한 이름이 생각안나는 그 쉐프). 뭐 세상엔 화나게 하는 일들이 정말로 정말로 많이 일어난다. 자꾸 시킨 일은 안하고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전화를 받는 다는 핑계로, 누군가를 '잠깐'만난다는 핑계로,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잘도 일터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가 돌아온다. 

이런 한타방의 소동은 결국, 견과류 알레르기를 가진 여자가 병원으로 실려가며 최정점에 도달한다. 결국 이것도 그런 기저들이 모여서 이뤄진 것. 어딘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는 결국 튕겨져 나왔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 대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받고 있는 거이다. 그리고 극중에서 끊는점이 그 지점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지금껏 물이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알콜이고, 알콜의 끓는 점은 물보다 훨씬 낮다는 것. 그러니까 그는 이미 이전부터 증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걸 알았으니 이제 기화될 수 밖에. 영혼이 날라갈지도 모르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까. 알콜중독고 마약중독에 빠진 메인쉐프는 그럼 여태껏 근무시간 내내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한 상태로 요리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거야.


TMI)

1. 유익한 것 : 양고기는 원래 분홍색으로 먹는거야.

2. 나의 과학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던 스프먼저 넣고 라면 끓이기. 그럼 그렇지, 정량화된 계량을 하지 않고 이론만으로 생각했으니 그렇지. 그래서 계산이 중요하고 사고실험은 실제로 검증되야 한다. 돌비현상을 막기 위해서가 더 타당하다니까.


오후 영화 <붉은 별> 코멘트



식곤증 때문인지 포스터를 보고와서 지친 모양인지 솔직히 영화를 보다가 조금 잤던 것 같다. 그래서 내용적으로 자세하게 코멘트를 하는 것은 실례일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얘기를 해본다면, 우선은 처음에 예매를 한 이유는 '러시아'를 다뤄서 였다. <천안문의 망명자들>과 같은 영화 처럼, 영화예술이 (모두는 아니지만) 누군가를 통해서는 사회를 비판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전자에 해당하는 듯 했고, 영화도 그랬다. 영화의 배경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난 분명히 이곳이 엄청나게 큰 러시아 도시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 나오는 어느 아르헨티나 감독의 남동생은 친구와 함께 그곳의 빈집을 돌아다닌다. 정확히 말하자면 빈집의 지붕 아래와 위를 쏘다닌다. 사람이 없는 빈 건물에서 나오는 으스스한 분위기는 어쩌면 우리가 성당에 가서 느끼는 어떤 홀리함(신성함)을 느끼는 메카니즘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러시아는 분명 레닌과 마르크스가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뤄냈다, 라고 말하며 국가의 토대가 발생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현대의 러시아에서는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2022년 2월 현재에 일어난 일은 물론이고, 그 전의 러시아의 행보를 본다면 그 국가의 움직이는 사람들은 전채주의와 독재임이 분명해 보인다. 어떤 러시아 시민은 그것을 느끼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우리는 사회주의 낙원을 표상하며 100년 동안 이어져 왔어.'라고 외치는 듯 하지만, 결국엔 그런 정신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고 있고 (여담이지만, 동독 지역에서는 아직도 소수지만 이런 담론이 오간다고 한다.)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은 자본주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내용에 관해서는 이정도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본다기 보단, 현대미술 전시회에 가면 으레 있곤 하는 1시간 반 짜리 영상작품을 본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영화이나 영상이 졸리다는 건 아니다. 아직 못봤지만 태국 감독이 만든 <엉클분미>가 이런 미술작품의 일부로 만들어졌다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으니까. 

D와 만나 점심을 먹을 때, 지금까지 본 영화는 다 너무 좋고 잔 적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 발언을 하고 세 시간도 안돼서 영화를 보다가 자고 말았다. 그래도 이런 경험도 소중하다. 


2일 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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