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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Jun 19. 2016

낭만적 사회와 그 적들

프라하를 떠나오며


프라하라는 도시가 알려진 건 우리나라에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방송되고 난 뒤부터였다. 낭만적인 도시의 풍경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곧 프라하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유럽의 도시 중 하나가 됐다. 내가 첫 여행지로 프라하를 잡은 이유도 이를 무시하지 못했다. 실제로 프라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첫날 나는 프라하 남쪽의 비셰흐라트 성(Castle)를 돌아나와 시원한 풍경을 돌아보았고 이틀후에는 구시가지와 까를교(Bridge), 프라하 성을 방문했다. 주황색지붕과 파스텔색의 건물, 그리고 중세부터 내려온 하늘 높이 솟은 교회건물들은 하늘이 흐리건 맑건, 낮이건 밤이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프라하라는 낭만적인 이름 뒤에는 가슴아픈 역사가 숨어있었다. 체코인들은 중세와 근대내내 자신들의 온전한 나라를 갖지못했다. 그들의 적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400년 식민치하 시절로 출발하여 1차세계대전 이하의 나치치하,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아래에서의 사회주의 체제까지 옮겨졌다. 프라라 성에서 합스부르크 치하시절의 치욕적인 이야기, 나치는 말할것도 없겠지만 나는 특히 2차대전 이후의 냉전시대의 체코 역사에 눈길이 갔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원조하며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주입해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제와 압박이 심해졌다. 이때, 둡첵이라는 사람이 제1서가장 자리에 오르며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민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이는 제제를 완화하고 도청을 금지시키는 쪽으로 나아갔다. 소련에게는 당연히 이같은 행보가 좋게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심어놓았던 사회주의의 열마가 맺히기도 전에 다른 열매가 열리는 꼴이었으니까. 결국 1968년, 여행책자에는 신시가지의 중심이자 쇼핑의 거리라고 표상된 바츨라프 광장에 소련의 군대가 모인다. 그 앞에는 그를 대항하는 체코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탱크앞을 막는다. 상식적이라면, 군대는 민간인을 건드리면 안되지만 발포명령이 내려진다. 백명이상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 사건은 세계로 전해졌고 이것이 바로 '프라하의 봄'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제제는 더욱심해졌고, 이후 체코는 험난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체코의 봄은 사건 이후 20년이 흐른뒤에야 고르바쵸프에 의해 소련이 붕괴대며 맞게된다. 체코는 사회주의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며, 프라하의 봄 사건 이후 시골로 유배갔던 둡첵이 다시 제1 서기장의 역할인 국무총리(민주주의체제니까)로 올라선다. 그리고 대통령자리에는 프라하의 봄 사건을 이끌었던 시민단체 수장 하벨이 올라선다(프라하 공항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그래서 사실, 체코라는 나라는 94년에야 체코와 슬로카비아가 나뉘어지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우리나라 역시 가슴아픈 일제치하시절,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략 그리고 민주화 운동까지 체코와 닮은 점들이 보였다. 그 순간 코카콜라와 맥도날드가 들어선 바츨라프 광장이 시민들의 피로 지켜낼 수 있었던 의미깊은 장으로 다르게 보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썼다. 그것을 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잘못을 기록해 현재에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는 여전히 예전의 악습을 반복하고 있다. 둡첵이 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이제는 그 슬로건이 21세기의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민주주의"로 다가와야 한다.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세대를 나타나는 말로 '방관'이 가장 적절한 거 같아. 나도 동감한다. 나도 그러니깐. 나의 적들에 대해 항의나 반기를 들지못하고 관조나 체념으로 대하고 있었으니깐. 하지만 그러면 바뀔수가 없다. 그러나 근 몇개월동안 나는 희망을 봤다. 지금이 그 과도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빈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있다. 바로 전날 오후, 나는 프라하의 시민회관 일층에 있는 카페에서 흑맥주 한잔을 시켜마셨다. 프라하의 흑맥주는 쓰지않고 달았다. 어쩌면 너무나 긴 힘든시절을 보낸 그들에게 맥주라도 달아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카페 중앙에서는 여든은 되어 보이는 세 명의 노인이 피아노와, 베이스와 색소폰 연주를 했다. 나이로 짐작해 보건데, 그들은 2차 대전 이후의 공산주의, 프라하의 봄 그리고 체코의 민주혁명을 가리키는 "벨뱃혁명"까지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다. 아마 그 앞에서 그것을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연주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기쁨의 미소를 보았다. 곡이 끝나고 나는 그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낭만적 사회와 그 적들>이란 제목은 김소진작가의 단편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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