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retrotopia]
시험이 끝난 뒤 다음날 한 일 중에 하나는, 지하철이나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보고 싶어서 점찍어놓았던 전시회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첫 타자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베를린 공예박물관 [Kunstgewerbemuseum]에서 하는 디자인 전시를 골랐다. 전시회 제목은 retrotopia : design for socialist spaces였고, 1900년대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여러 나라(유럽에 속한)의 삶(Wohnen)과 연관된 디자인에 관한 전시였다. 박물관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운 좋게도 오늘(4월 13일) 큐레이터의 설명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4유로 더 비싸지만 그것으로 표를 미리 구입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좋은 선택이었고 역시나 전시는 설명이 대동했을 때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구나를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다.
베를린 공예 박물관이 있는 단지는 그 근방이 모두 갤러리나 박물관 그리고 필하모니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 섬만큼 크진 않지만, 문화시설이 꽤 밀도 입게 군집되어 있고, 단지 바로 위에는 동물공원(Tiergarten)도 있어서 관람 전 후 산책을 하기도 좋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도 있으니 여기를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는 조금 일찍 와서 먼저 전시관을 30분 정도 돌면서 대충 훑었다. 전시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1900년대 중후반의 레트로틱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충분히 눈이 즐거웠다. 전시는 두 개의 파트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매표소 바로 아래층에 자그맣게 자리 잡은 공간에 있었던 [전시회] [네트워크] 등을 주제로 한 것이었고, 하나는 메인전시로서 복도를 따라가서 지하로 내려가면 있는 더 큰 공간에서의 전시였다. 큐레이터의 설명은 모두 이곳에서 한 시간 반정도 이어졌다. 원래는 한 시간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큐레이터 본인도 흥이 나신 것 같아 계속 말을 했고 나로서도 시간이 오버되어도 재밌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메인전시관은 원형으로 된 큰 공간을 나누어서 각 섹션마다 전시물이 있었다. 일종의 기조연설이자 도입개념으로 큐레이터는 먼저 베를린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박물관이 있는 곳은 장벽으로 나뉘고 나서 생겼다고 했다. 이유는, '국립'의 성격을 띠는 공간이 동독 쪽에 었었기 대문에 서베를린에서도 시민들을 위해 그에 합당한 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이는 동물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베를린은 (아마도 유일한?) 한 도시에 동물원이 두 개 있기도 하다. (아직 두 군데 다 못 가봤다... 한국 잠시 들어가기 전에 다 가봐야지...)
어쨌든,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녀(큐레이터)는 다른 유럽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물론이거니와 에스토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전 유고슬라비아 국가였던 크로아티아에서 온 사람들까지. 그녀에게는 이번 전시가 본인에게도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워낙 많은 나라에서 전시에 참여하다 보니, 전시물들 간의 언어장벽이 존재했고, 따라서 섹션을 나누고 오브젝트를 구성할 때 반드시 나라별 카테고리로 묶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됐다. 팸플릿에 쓰인 번호와 상관없이 전시관으로 들어가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첫 번째 마주한 것은 우주를 표현한 공예품. 옛 소련 및 사회주의는 '우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를 포함하여) 그래서 우주라는 공간도 그들(여기에서는 소련에 국한되는 듯했다.)에게 중요했고, 그래서 우주를 본뜬 이상한 모양의 청소기도 볼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건, 소련에는 반비밀조직(Semigeheimnisorganisation)으로 서방의 디자인을 분석하는 부서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물건들을 사서 그것들을 탐구했고, 나중에 제품을 만들 때 참고도 했다고 큐레이터는 말했다.
그다음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쪽에서 온 몇 가지 가구와 전시공간사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가 말하길, 여기 있는 전시물 중 많은 것들은 디자인적으로 프로토 타입이 많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1960~70년대에 그 나라에서 미래의 디자인으로 바탕으로 물건을 설계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전시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해당 국가의 박물관에서 온 것들이 많다고 했다. 전시공간의 설명이 흥미로웠는데, 공간 자체를 몇 가지의 간단한 조명과 격벽들로만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효율성을 최대로 높이려고 했다고 한다.
그다음으로는 Karlsbad라는 도시(체코)에 있는 Hotel Thermal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실제 사용했던 의자와 조명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그야 말고 '환상적'이라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여서 조명을 빨간색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렬한 색들이 어우러진 식당의 모습은 고급스러웠다.
그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디자인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사회주의에 속한 나라들에서는 어떤 제품을 만들 때 사람들의 원하는 일종의 욕구(Bedürfnis)를 충족시키기 위해 실용적인 디자인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에 반해 자본주의는 빠르게 많이 팔기 위해 '디자인적 효율'보다는 '화려함'이나 '속도'를 상대적으로 더 생각했다고. 그래서 과한 포장(Mogelpackung)과 같은 것도 나온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시대는 조금 떨어져 있을지도 몰라도, 내가 늘 봐왔던 과대포장의 모습이 자본주의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밸런타인 초콜릿을 싸고 있는 수많은 종이 내지는 플라스틱과 리본들. 창고에서 효율적으로 쌓이지 않는 것들. 이는 그 물건의 가치를 실제보다 부풀리면서 사람들의 허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을 채워준다.
그다음으로는 헝가리에서 제작된 카펫 내지는 직물 제품과 의자를 보았다. 여기에서는 구역을 나누는 것(Eingeschlossen / teilen)에 대한 의미를 들었다. 의자라는 것도 결국엔 사람이 '혼자'앉으면서 다른 이와 구역을 나누는 물건이기도 하고, 확장하면 카페나 식당에서도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로 이루어진 모듈이 각각 '나뉘'어지면서 전체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직물에 그려진 디자인을 보면, 거기에서도 선반에 나뉜 물병의 이미지가 보였고, 어떤 도시의 지도가 나오면서도 구역이 '나뉘'어지는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경우에는 베를린 장벽이 이 것을 수십 년 동안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됐다.
이런 구역/또는 공간(Raum)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생각들은 1950년도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앞서서 말한 소련의 경우처럼 '우주'도 결국 지구 바깥의 '공간'이고, 결국 디자인이라는 것도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이면서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전시물의 디자인을 설명하면서 전통적인 설계(Entwurf)라는 용어 대신 구성(Gestaltung)이라는 단어가 좀 더 이 전시와 어울린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보았던 건 키릴문자로 만들어진 노트북에 수화기도 있고,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였다. 그녀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디자인을 할 때 일찍이 자원의 고갈 문제를 생각하여 주어진 제품의 크기에서 다양한 것을 넣을 수 있도록 (혹은 가능할 수 있도록)하는 디자인도 고려됐다고 말했다. 이것 또한 사회의 필요(Bedürfnis der Gesellschaft)와 이어지는 것이라고. 자본주의에서는 보통 생산 단가를 낮추어서 한정된 자원에서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까를 고민하는 것과 참 다르게 생각됐다. 지금이야 경제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기본적 본성과 관련하여) 사회/공산주의를 시도했던 여러 나라들이 자본주의로 바뀌어갔지만, 이런 사회주의적 생각들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척'만 아니라 정말로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는 일종의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려면, 미국 중심의 경제 시스템, 끊임없는 성장 많을 고려하는 자본주의에서도 더 많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이에 따라 옆에 전시된,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빌트인 주방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것으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과 비슷하겠지만) 작은 공간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크지 않은 집에 사이즈에 맞게 생산된 아담하지만 실용적인 가구들이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덧붙이는 말 : 유고슬라비아도 지금의 나라들로 나뉘기 전까지 당연하겠지만 본인들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기조가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라고까지는 잘 못 들었음..)
마지막 설명을 들었던 것은 내가 처음 접하는 '지중해게임'이었다. 이것은 올림픽과 비슷한 체육행사였는데, 이 지중해 게임의 로고는 다섯 개의 원으로 된 올림픽 로고에서 밑에 두 개를 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세 대륙(아시아/유럽/아프리카)을 의미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의 로고 역시 '지중해'라는 테마를 살리기 위해 이 세 개의 링이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게 디자인되었다. (위키를 찾아보니 1951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역사 깊은 대회임을 알게 되었다. + 독일은 지중해와 접하지 않아서 낄 수 없다, 하지만 포르투갈,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같은 나라는 지중해와 접해있지 않지만 참가한다.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됐던 큐레이터 투어는 끝났고, 마침 박물관도 문을 닫을 시간이라 짐을 다시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한국에 있을 때도 박물관 가는 걸 좋아했지만, 여기 와서는 언어의 장벽 탓에 쉽사리 내가 좋아하는 텍스트가 중요한 현대미술이나 이런 사회와 연결된 것들을 잘 즐기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늘 큐레이터 투어를 신청한 것도 이제 독일어도 어느 정도 늘었으니, 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지 시도해 보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100%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60~70%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이런 곳에서는 구어체가 아니라 표준 독일어로 또박또박 말해줘서 좋다...) 그걸 토대로 오랜만에 전시 글도 쓸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생각했던 시험 일정은 끝났으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런 기회를 좀 더 가져보려고 한다. 그리고 웬만하면 듣기 평가도 할 겸 설명이 있는 걸 들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E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