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촐트 초기 TV영화 작품
<Cuba Libre>
영화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의 베를린 중앙역에서 시작된다. 역 안을 아침부터 서성이는 사람들, 그들은 기차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역 안에 존재한다. 페촐트의 유령 삼부작을 다뤘던 어떤 책에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런 ‘역’이라는 공간은 Leerstellen(빈 공간)이라고 평론했던 사람의 말이 생각이 났다. 그 말에 따르면, 역은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지, 거기에 길게 머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쿠바 리브레>에서의 역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에 의해 머무르는 공간이다. 그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누군가를 꼬드기기 위해, 일종의 낚시를 하는 공간이다.
그의 중기 영화에서 물이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많은 영화에서 죽음에 비유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초창기작들을 보면 이 ‘물’을 품은 ‘바다’라는 공간은 조금 더 희망에 찬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은 현재의 삶을 떠나 바다로 향하길 바란다. 어쩌면 독일은 우리나라와 달리 북쪽만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그 공간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쿠바 리브레>에서 주인공들은 그들이 예전에 있었던 쿠바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스페인의 한 해변 혹은 프랑스의 바다 근처 마을로 이동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속고 속인다. 톰은 쿠바에서 티나를 버리고 독일로 도망을 왔다.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해 버린 티나에게 톰은 복수의 대상으로 변해있다. 한편, 지미는 중앙역에서 걸인처럼 있는 톰을 몇 번이고 호텔로 데려가 잠을 자게 해 준다. 하지만 그의 이런 호의는 결국 그를 이용하기 위함이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보는 스크린 안에서, 최소한 톰은 그가 저질렀던 과거의 실수-내지는 행동-을 다시 하지 않는다. 그는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고, 목적지에 혹은 목적에 다다르기 위하여 행동한다.
돈은 중요한 물질이다. 그의 전작들에서는 그것들이 좀 더 직접적으로 다뤄진다. 아직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의 독일 마르크, 그 마르크가 사람들 손에 쥐어지고, 거리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스크린 안의 주인공과 스크린 밖의 사람들 모두 욕망을 인지한다. “부자들만이 떠날 수 있다.”라는 씁쓸한 문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적용된다. 문득, 지구가 망했을 때 우주로 떠나는 로켓을 타는 여러 가지 영화들이 생각난다.
‘망한다’라는 의미는 ‘수중에 돈이 더 이상 없다.’라는 것과 귀결된다. 그것은 ‘파산’이다. 그의 다른 작품 <옐라>에서 옐라는 다른 남자에게 자신이 전남편을 떠난(마음도) 이유가 그가 파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네가 망하는 걸 보고 싶어.”라고 티나가 톰에게 말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에 따라 기분이 바뀐다. 돈이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지미의 말처럼 ‘내면의 중심을 찾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쿠바 리브레’라는 술은 럼에 콜라를 탄 값싼 칵테일이다. 어찌 보면 서양식 하이볼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페촐트는 그의 최신작 <Roter Himmel>의 코멘터리에서 주인공 ‘레온’이 쓰고 있는 (실패한) 소설인 ‘클럽 샌드위치’에 대해서 언급했다. 가장 흔하고 기본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 질이 좋지 않은.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초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의 제목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쿠바 리브레>의 주인공들은 결국엔 자신들의 원래 상태일지도 모르는 기본의 상태, 가난의 상태로 돌아간다. 아참, 학교를 다닐 때 근처에 이었던 값싼 칵테일 바에서는 Ganan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팔았다. 이 ‘Ganan’은 소주에 콜라를 탄 것이었다. 그것의 맛은 마치 베를린에서 마셨던 쿠바 리브레와 비슷했던 것 같다…
<Beischlafdiebin>
독일어는 합성어를 만들기 쉽다. 그저 단어와 단어 사이를 공백 없이 메꾸면 된다. <Beischladiebin>또한 그런 원리로 만들어진 제목이다. Beischlaf는 ‘성관계’라는 의미가 있지만, 한국어와 비슷하게 ‘동침’이라는 겉보기 뜻이 보인다. ‘Diebin’은 여자도둑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영어제목인 ‘섹스 씨프(Sex Thief)’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일어로 섹스는 ‘Geschlechtsverkehr’라는 단어가 이미 있으니, 그가 굳이 그 단어가 아닌 Beischlaf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영화를 보면 그것이 더 이해가 됐다. <Beischlaldiebin>은 그의 다른 영화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적절한 음악을 쓰는 것은 같지만, 분위기가 좀 더 스릴러에 초첨이 맞춰져 있었다. 시작은 모로코의 바다 근처의 한 호텔에서 시작되고, 그곳에서는 수년간 호텔 로비에서 남자들을 꾀여 침실로 데려간 뒤 귀중품과 돈을 터는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이 일을 꽤 오랫동안 해왔다. 이제는 자신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일을 청산하고 자신의 독일 집-쾰른-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녀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고, 그녀가 범죄를 해온 이유는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동생에게 자신이 호텔매니저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끝나지 않는, 호텔을 오가는 생활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독일로 돌아왔을 때, 자신과의 기대와는 다르게 동생은 공부를 했음에도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직업을 가지지 못했고, 대출로 인하여 그녀가 이제 여생을 보내기로 희망했던 집이 저당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생의 취업활동을 감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결국 그녀는 동생에게 자신의 수법을 가르쳐 주지만, 오히려 걸려 들어간 것은 순진한 동생이다. 자매는 그렇게 쾰른의 호텔 로비를 떠돌며 그들의 빚을 갚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일’을 갈망한다. 이는 <옐라>에서 나온 테마와 연결된다. 아니, 이 영화에서의 돈, 일,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들이 <옐라>까지 이어진 것일 테다. 일을 왜 하는가, 돈이란 무엇인가.
페촐트의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돈 때문이 죽어나간다. <쿠바 리브레>의 마지막 장면, <옐라>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 그리고 <Beischlafdiebin>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지금까지 범죄를 저지르며 돈을 번 것은 언니인 페트라인데, 죽는 것은, 그것을 어설프게 하는 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어설픈 ‘일’을 하면 그것의 결과로 돈 대신 죽음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돈은 그런 면에서 폭력적이다. 돈은 주먹을 부르고, 전기 충격을 당하는 이유기도 하며 총격을 맞기도 하는 이유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도둑들이 나오는 영화에는 총기가 항상 등장한다. 은행을 털 때 도둑들은 총을 사용한다. 그 도둑들을 잡는 경찰들도 총기를 동원한다. 그러니까, 돈이라는 것은 상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거래가 일어날 때에는 총기가 그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런 폭력 안에서 사람들은 멍이 들거나 정신을 읽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마침에 목숨까지 잃는 지경에 이른다.
도둑이라는 존재들은 늘 쫓긴다. 경찰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얼마 남지 않는 시간(자신이 도둑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제한된)에 쫓긴다. 그 세계 안에서 역시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고, 이용당했다는 것에 절망한다. 가족관계 내에서도 거짓말이 오간다. 직업을 속이고, 빚을 축소해서 말한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는 비극보다 실제 비극은 더 크고, 극이 진행되면서 주인공들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당 잡힌 삶의 막다른 길은 죽음으로 귀결되고, 그 죽음이 비극의 블랙홀을 막는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그것은 그저 스크린 안에 남겨진 존재들이 관객들의 관측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남겨진 상태로 흘러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