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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Apr 01. 2024

<Wolfsburg>

페촐트 감독전 in 시네큐브 광화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튜브 영화 항목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작품, 하지만 자막이 아예 없어서 영화를 두 번이나 봤지만 세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이번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진행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전에서 다시 한번 한글 자막과 함께 보게 된 작품. Deutsch Kinematik에 의하여 2D 리마스터링이 된 것처럼 보이는 영화는 노트북 스크린으로 볼 때보다 좀 더 매끄러운 영상이었고, 나는 이내 주인공이 빨간색 차를 몰고 가며 자신의 여자친구와 다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첫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주인공인 필립이, 그가 차로 라우라의 아들을 치기 전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물이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잡식성이라, 죽어가는 인간이나 죽은 인간의 시체 또한 잘 먹었을 것이다. 근처도시인 뉘른베르크에 잠시 하루 놀러 갔을 때, 나는 그곳에서 지하감독 투어를 들었고, 도시의 어떤 구역은 몇 백 년 전 도시에서 죄인의 형벌을 내리고 교수형을 처한 뒤 그 시체를 두는 곳의 이름을 ‘까마귀’가 들어간 것으로 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 까마귀가 한국만큼 흉조로 여겨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까마귀는 그 이름을 따라 기본적으로 까맣고, ‘남은 것’을 ‘처리’하는 용도로 종종 사용된다. <옐라>에서도 스산한 느낌이 들 때마다 주인공 옐라의 귀에 들린 것은 까마귀 울음소리였고, 그 소리는 유령의 존재 혹은 유령이 되는 존재의 등장을 암시했다. 
 
 여자친구와의 전화통화로 보건대, 필립은 ‘외면’ 혹은 ‘회피’의 성질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공간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부주의’는 그로 하여금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이라는 단어를 뱉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전망주시 ‘부주의’로 인한 사고를 나게 만든다. 그는 이런 부주의 때문에 여자친구와의 재결합 속에서도 라우라의 구두를 차에서 제거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도 결국 라우라에게 칼에 찔린다. 자신이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 것들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상사가 그에게 말했던 ‘성실하지 못함’을 내포한다. 그는 자동차 사고 후 여자에게 어떤 부품이 부서졌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경찰에 자수를 하려고 대사를 연습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불성실’은 게으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는 곧 좋은 ‘타이밍’을 놓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는 한 발 짝 늦고, 한 발 짝 늦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복원해보려고 하지만, 결국엔 또다시 실수-내지는 고의적 지연-를 한다.
 
 <볼프스부르크>에서는 범죄 장면이 나온다. 뺑소니라는 중범죄부터 라우라가 자신이 일하는 마트에서 저지르는 물건 빼돌리기도 있다. 하지만 경찰은 이러한 이유로 그들을 찾지 않는다. 경찰이 그들을 찾아오는 이유는 다른 불행이 그들을 닥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범죄행위는 다른 식으로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건의 정확한 시간순서를 알 순 없지만, 라우라의 아들이 차에 치인 것은 어쩌면, 그녀가 계속해서 저지를 도벽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 필립의 경우는 뺑소니 후 결국 자신 또한 칼에 찔리는 것으로 단죄를 받는다. 그러니까, 범죄의 고리를 엮으면, 그들은 엮일 수밖에 없는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통시스템, 그러니까 자전거-자동차로 이어지는 바퀴 달린 객체가 인도한다. 



 
 한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영화제목임과 동시에 주인공들이 머무는 도시인 ‘볼프스부르크’는 독일의 도시로서 자동차 회사엔 폭스바겐의 본사 및 공장이 위치한 장소이다. 여러 평론에서, 페촐트가 그간 다뤄왔던 ‘돈’이라는 물질과 독일의 재통일 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자동차라는 물질은 물질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물체임과 동시에 욕망을 투사시키는 물체이기도 하다. <옐라>에서 그녀가 역시 ‘필립’이라는 남자가 모는 쌔끈한 빨간 벤츠 해치백에 마음을 뺏겼던 것처럼. <볼프스부르크>의 필립 또한 빨간색 자동차를 몰았고, 그것은 레블론 R080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번호판에는 FORD라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자동차의 역사에서 ‘포드’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장치는 영화 속에서 라우라가 한동안 오해하고 있던 자동차의 종류를 환기시키는 한 편, 자동차라는 물질이 어떻게 주인공들을 몰락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가도 말해준다. 
 
 여기서도 ‘물’은 중요한 소재 중 하나다. 라우라는 아들을 잃은 후 슬픔에 빠져 강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는 한편, 필립의 여자친구인 카탸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채로 피립과의 만남의 종말을 얘기한다. 라우라의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바다로 향하고 싶어 한다. 결국 필립과 라우라가 마지막 장면에 빨간 차를 타고 바다로 떠나고 거기서 사랑을 나누지만, 결말은 좋지 않다. 어떻게 말하면, 자신의 정면으로 물을 받아낸 존재들만이 살아남는다. 끝끝내 물에 들어가지 못한 라우라의 아들과 필립 만이 영화에서 죽는다. 
 
 시간순으로는 <볼프스부르크>를 먼저 보고 그 후 전 글에 썼던 <Cuba Libre>와 <Beischlafdiebin>을 봤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볼프스부르크를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끊임없이 그의 다음 영화의 그의 전 영화의 족적들을 남겨두었다. 라우라의 아들이 다시 깨어난 것을 안 필립은 카탸와 함께 쿠바로 떠난 뒤 결혼식 사진을 찍는 한편, 그들은 카사블랑카로 향하고 싶어 한다. 



 
 이 영화에 대한 좀 더 정돈된 감상을 남기는 것은 나중의 나에게 남겨놓기로 하고, 글을 끝마치기 전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한다면, 페촐트의 영화에서는 거의 항상 남자가, 혹은 위치상으로 더 위에 있는 사람이 운전을 하며 여성이나 주도권을 내어준 쪽이 조수석에 앉는다. 이는 <볼프크부르크>뿐만 이 아니라 <열망(Jerichow)>, <엘라(Yella)>는 물론 <피닉스>와 <쿠바 리브레>에서도 재현된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 사회생활의 기본예절이라고 배웠었던 자동차 내에서의 배석에 대한 것이 떠오른다. 운전기사가 있을 경우엔 상급자가 오른쪽 뒤에 앉고, 하급자가 조수석에 앉는다. 상급자와 하급자가 있을 때는 하급자가 운전을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맞는지는 검색을 통해 더 확인해야 할 것이다. 다만, 페촐트의 영화에서는 그 관계가 뒤집힌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즉, 자동차 안에서 두 명이 동시에 앞자리에 앉고 있지만, 그 관계는 전혀 동등하지 않다. 어떻게 따지면, 상급자가 운전까지 하고 있는 상황을 미루어 보면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우선권도 상급자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재미있는 까닭은 영화에 따라 그 상황이 유연하게 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볼프스부르크에 가보지 못했다. 다만 역을 지나치면서 중앙역 바로 옆에 있는, 폭스바겐의 로고가 박힌 공장의 건물을 봤을 뿐이다. 그들은 한 때 골프라는 디젤 엔진의 혁신을 팔면서 뒤로는 ‘불성실’하고 ‘부주의’하게 배기가스 조작을 한 이력이 있다. 그들은 아직 권력을 쥐고 있다. 페촐트가 10년도 더 전에 만들었던 <볼프스부르크>에서 그들은 어떤 역할을 받았었고 혹은 받을 것인가?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 이 영화 <볼프크브르크>를 통해 남겨진 질문 중 하나이다. 


사진출처 : https://www.kino.de/film/wolfsburg-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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