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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Jan 05. 2025

미열병

2024년 12월 31일과 2025년 1월 1일날 나는 감기기운이 도졌다. 1월 3일날에 비엔나를 가기로 했던 상태라, 감기약을 매끼마다 챙겨먹고 아랫층에 지인이 준 사골가루를 물에 끓여 먹었다. 2일날 오후쯤이 되자 몸이 조금 나아졌고 비엔나로 다음날 향했다. 하지만 비엔나에 도착하고나서도 감기기운은 미약하게 남았고, 때문에 나는 오전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보냈다. 지금은 오전에 방을 청소하는 시간이라 잠시 로비에 나와있다. 나는 왜 아픈걸까? 가족들과 얼마전에 통화했을 땐, 한국은 요새 독감이 유행이라고 했다. 바로 그 전 주에 아버지와 통화했을 때, 아버지도 감기에 걸려서 피곤한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약간의 폐렴증세가 보여서 동네에 있는 내과로 가서 약과 링거를 처방 받으셨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그 바이러스가 날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행성, 이란 그런 것이니까.


한편, 요새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12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에서 가까스로 표결을 성공시켜 해제햇지만 나는 그때부터 불안해진 것 같다. 한국과 독일과의 시차는 여덟 시간이고, 내가 잠자리에 들 때쯤 한국은 아침 여섯 시에서 일곱 시가 된다. 나는 그때부터 핸드폰을 부여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뜬 눈으로 유튜브 라이브나 속보로 올라오는 뉴스기사 같은 것을 보기 시작했다. 내란성 불면증, 유시민 작가가 이렇게 명명한 그 증세는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새벽 세 네 시에 자는 일이 흔했고, 오전엔 무기력했다. 그래서 12월 중순 부터 방학이었지만, 도통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만약에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국회가 점령당했더라면,이라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들. 하지만 아주 작은 확률들이 모여 어떤 세계에서는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그 이후의 상황들을 상상하면서 편두통이 시작됐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독일로 넘어오고 난 뒤 종종 같은 꿈을 동일하게 꿨다. 나는 버스 내지는 SUV에 탄 채로 저녁의 한강 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나는 창문을 내린 채 바람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때 하늘에서 미사일이 빗발치기 시작한다. 아파트가 쓰려지고, 충격음이 들린다. 아마도 이런 꿈은 독일로 가기 전 2월에 벌어졌던,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미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현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지속적으로 들리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오물 풍선을 날리는 장면들도 그 꿈을 이루는 조각이었다.


계엄이 일어나고 난 뒤에 군대에 있던 자들이 하는 증언을 들으면, 윤석열은 일부러 북한을 도발하고 외환을 유치함으로써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던 것 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고, 백령도에서 수백 발에 포를 쏘고, 오물풍선을 날린 지점에 '선제타격'을 하라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이것들 중 만에하나 하나라도 북한의 국지전이나 전쟁에 준하는 반응을 일으켰더라면, 그 이후의 상황은 정확히 내 꿈과 일치했을 거다. 그리고 만약에 그때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내 미열은, 그런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다른 세계의 나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을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작년 이맘 때 쯤(2023년 12월)엔 태국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을 보았더랬다. 거기에는 한 중년의 여인이 병원에서 누워있는 한 병사를 돌본다. 현재와 과거가 어루어지며 과거에 있었던 폭력에 대해서 천천히 조망한다. 2025년이 되기 전엔 또 다른 베를린 학파의 감독 중 한 명인 '울리히 쾰러'의 <수면병>도 보았다. 주인공인 의사는 가족들을 독일로 보내고 난 뒤에, 카메룬에 계속 머물면서 수명병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만 종단엔 씁쓸한 최후를 맞는다. 첫 번째 영화가 '병'을 알고 치유해과는 과정을 그렸다고 본다면, 두 번째 영화는 '병'을 넘어서지 못하고 죽는과정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병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낫거나 낫지 않거나. 낫다고 착각한 순간, 잠복기에 있던 바이러스나 균이 언제 또 숙주를 죽음으로 몰아갈 지 모른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현상들, 그러니까 낡은 이념과 사상만을 가지고 왕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혹은 그들을 따르는 척 하며 실제로는 자기 자리보전이나 자기의 이익 혹은 자신도 같은 배를 타버려서 다시 되돌아갈 길이 없는 자들이 그 바이러스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87년 이후,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병이 다 낫지 않았다. 이제 그 세력은 대놓고 법을 무시하고 궤변만 늘어놓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비정상의 영역을 자꾸 정상영역으로 끌어오고, 기계적 중립을 무지성적으로 지키는 언론에 의해서 한국의 정치상황은 전두환이 내란을 일으킨 그 시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복한다. 그들은 바이러스다. 그들은 암세포다. 이번 기회에 깔끔히 뿌리뽑지 않으면 짧으면 십 년, 길면 이십 년 안에 이러한 일은 또 일어날 것이 뻔하다. 예후가 좋아지려면 박멸하는 것 밖에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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