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도시 중 어디가 제일 무거워?라고 물으면 나는 그 질문에 베를린이라고 답할 것이다. 어떠한 물체의 질량이 무거울 수록 주변에 있는 다른 물체들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고, 블랙홀은 빛조차 삼켜버린다. 나에게 있어서 베를린이란 블랙홀까진 아니지만 큰 항성쯤은 되는 곳이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은 이곳을 찾게 된다. 2월에는 고정적으로 오게되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제때문이다.
올해 영화제는 2월 12일 부터 22일까지 열렸고, 나는 베를린에 19일부터 24일까지 있어서 중간 4일간 영화제를 방문할 수 있었다. 22일에 상영하는 영화들을 2월 8일에 이미 티켓이 열려서 미리 샀었고, 그 외에는 상영일 기준 3일 전부터 예매할 수 있어서, 동생을 만나러 NRW에 갔을 때 매일 아침 10시에 시간에 맞춰서 수강신청같은 예매를 했다.
19일날은 베를린에 4시에 도착이라 저녁 영화 하나만 예매했고, 다른 날은 3개씩 예약을 했으나, 토요일 체력이 방전되서 원래 밤 10시에 예매했던 영화는 결국 보지않았다.
영화제가 있는 기간에는 숙박비가 매우 비싸다. 베를린영화제는 이번이 4번째 방문인데, 첫번째 방문때는 베를린에 살고있을 때라 숙박비도 들지 않았고 영화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볼 수 있었지만 이사 후에는 금전적인 여력에 맞추다보니 4일을 넘겨본 적이 없다. 올해는 또 어디에서 숙박을 하지 라고 한참 호텔 사이트를 뒤져보다가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단기 베를린 숙소를 제공하는 글을 봤고, 하루에 단돈(?) 40유로를 하는, 한국인-미국인 부부가 사는 집의 한 방을 단기로 빌리게 됐다.
숙소위치도 괜찮았고, 방 컨디션은 너무 좋았다. 집도 깔끔했고, 업무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충분히 큰 크기의 책상도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집주인 내외도 좋은 사람들 같아서 아무래도 내년부터는 이곳을 미리미리 예약해서 올 것 같은 느낌이다.
목요일은 밤에 상영하는 경쟁작 하나가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있어서 돈도 인출하고 저녁도 간단히 먹을겸 근처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알고보니,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유학원의 도움을 빌려 독일은행 계좌를 열때 방문했던 도이치 방크 지점이 있는 곳이란 사실을 깨달았고 기분이 묘해졌다. 도이치방크 안으로 들어가 돈을 뽑으면서 대략 4년 전 쯤 여름에 이곳에 처음와서 떨리는 마음으로 계좌개설 순서를 기다리는 일이 생각났다.
저녁식사로는 근처에 있던 중국집 면집에 갔다. 고추기름과 소고기, 야채가 들어간 비빔면을 시키고 만두도 같이 주문하려고 했는데 만두는 이미 품절이라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돈으로 대신 제로콜라 한 캔을 마셨다. 음식은 매우 맛있었고 주인 할머니/할아버지도 친절했다. 다음에 오면 다른 메뉴를 또 먹어봐야지.
숙소에 들어갔더니 아까까지 있었던 집주인 부부는 외출을 한듯해서, 숙박비 5일치 200유로를 부엌에 두고, 그 위에 동생과 같이 먹었던 떡 낱개를 두 개 올려두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본 이번 영화제의 첫 번째 영화는 :
我们不是陌生人 / We Are All Strangers - Anthony Chen (Competition)
감상 : 처음에 영화를 고를 때 위에 올린 스크린 샷을 보고 <하나 그리고 둘>의 이미지가 떠올라 수작 영화이길 바라면서 예약했으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작년에도 경쟁작에 있었던 중국영화 <Girls on Wire>를 보았을 때도 참을 수 없는 화를 느꼈는데, 이번 영화는 그정도는 아니었지만서도 여전히 경쟁작으로는 부족한 수준 미달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감독 앤서니 첸은 주동우가 나온 <Breaking Ice>를 감독하기도 했는데... 그 영화도 서사적으로는 별로라고 소문이 났었다. 그리고 이 영화도 그랬다. 배경은 싱가포르이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한국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써먹어서 식상한 억지 설정과 신파- 그러니까, 고등학생의 임신과 출산, 말기암으로 인한 가족의 죽음 그리고 온라인 스캠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인물까지-가 두시간 반 동안 계속되어서 힘들었다. 신파가 아무리 서양인들이 덜 접해봤다 해도, 근본적으로 서사가 틀려먹었는데 경쟁작 후보에 걸러지지 않고 오는건지 신기하다... 영화 자체의 템포는 느리지 않았지만, 영화를 쌓아올리는 방법이 너무 위태로웠다. 감독이 영화 안에서 싱가포르에 대한 여러가지 사회상을 보여주려고 생각은 한 것 같았는데 (예를들면 다문화, 이민자, 법규 문제 등) 어느 하나를 집중하지 못하고 다 나열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고, 결국엔 아버지가 운영하는 시장의 한 가게를 그의 아들이 방탕한 생활과 한탕주의로 살아가다가 자식이 생기고 정신차려 가게를 이어받는, 다분히 보수적이고 안전한 쪽으로 영화가 끝나서 아쉬웠다.
작년 베를린영화제부터 집행위원장이 미국사람으로 바뀌고 나서, 영화제가 좀 더 흥행에 집중하려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작년에 헐리우드 스타들이 오고, 그들이 출연한 영화가 경쟁작에 많이 포진되어있기도 했다. 한편으론 중국자본이 많이 들어가서, 이전보다 중국계 영화가 늘어난 듯한 인상도 받았다. 좋은 영화라면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렇고 올해도 이런 아쉬운 수준의 영화(특히 중화권)가 경쟁작에 올라오는 것을 보면 혹시나 다른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 내 기억으론 작년부터인가 올해부터 TikTok이 공식 스폰서로 들어갔다.
아참, 영화관은 예술대학교 UdK 옆에 있는 Haus des Berlinale Festspieles이었고 이곳에서 본 두번째 영화가 됐다. (작년에 이곳에서 무엇을 봤는지 기억이 안나서 옛날글을 찾아봐야겠다...) 영화가 끝나고 숙소 근처로 가는 버스 막차를 잡기위해 지하철까지 본의아니게 뛰어갔고, 그래서 숨이 조금 찼다.
베를린 사진 둘;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가져가서 사진을 찍다보니 정작 핸드폰으로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1일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