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Berlinale : 2

by soripza


이틀차.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매일 3개의 영화를 예매했다. 금요일은 세 편의 영화 중 두 편이 한국 영화였고, 오전에 첫 번째로 본 영화는 유재인 감독의 <지우러 가는길>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인터뷰도 있었다. 보통 영화제가 끝날 때 쯤 가면 감독과의 시간이 없을 때가 많은데 운이 좋았다.


지우러 가는 길 / En Route To - 유재은 (Generation 섹션)


영화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낙태를 다룬 영화였는데, 주인공 고1 여학생이 아이를 임신하고 그 후 겪게 되는 일에 대해 그렸다. 보통 이런 영화는 결론이 낙태를 한다 / 하지 않는다, 그 둘 중에 무엇으로 가느냐가 중요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낙태를 하냐 안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인 윤지가 몇 주 간의 시간동안 일을 겪으며 어떤 경험을 하는지, 종단에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을 온전히 자신에게 맡기게 되는 과정이 더 중요하게 표현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상황도 꽤나 복합적이었다. 같은 기숙사 방을 쓰는 경선은 처음에는 윤지가 불법 약물이나 낙태시술을 받기 위해 자신의 돈을 훔쳐서 그녀를 잡기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사실은 엄마가 미혼모였다. 그러니까, 윤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경선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윤지가 나중에 찾아가는 모자센터에서 만난 중3 여자아이는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한다. 한편, 담임 선생의 아내는 아이를 가지기 싫어한 사람이기도 하다. 윤지는 이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윤지는 결국은 가족을 통한 수직의 연대가 아니라 수평의 연대를 선택하고, 영화 오프닝에서 늦은 밤에 홀로가던 기숙사로 향하는 길을, 엔딩에서는 친구 경선과 함께 외롭지 않게 간다. (영화 후 GV에서 유재은 감독은 두 주인공이 전날 기숙사 뒷산으로 가는 시퀀스가 제일 마음에 들고, 보면서 계속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면서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남성성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서는 아이를 임신시킨 남성이 보통 빌런으로 나오면서 긴장감을 조성할 때가 많지만, <지우러 가는 길>에서 담임선생님은 사진과 사람들의 입 그리고 아내에 의해 간접적으로만 표현될 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온전히 자신만이 짊어질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면서, 그녀에게 이런 큰 일을, 그리고 그 일을 둘러싼 갈등상황을 준 가해자는 텍스트 바깥에서 윤지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것은 윤지 뿐만 아니라 윤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내는 물론, 같은 반의 아이들 (특히 경선), 모자센터의 사람들... 그래서 나는 영화 <유전>이 생각났다. <유전>의 오프닝은 주인공 가족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만악의 근원인 그녀는 영정사진이나 사진으로만 언급될 뿐 영화에 단 한번도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다.(엔딩에서 모든 일이 정리된 뒤에 시체로 나오는 것을 제외하곤) 영화 안의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영화 텍스트 바깥에 있는 이와 싸운다.


영화에서 중요한 대사 중 한 가지는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사랑을 주어라'였다. 영화가 끝난 후에 한 관객도 그 의미에 대해 감독에게 물었다. 유재은 감독은 그것이 아마도 어른이 사랑이지 않을까 답했다. 동의한다. 윤지에게 일어난 일도 결국은 누군가가 책임지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윤지 주위에는 이런 '책임지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다고 느껴졌다. 윤지의 아버지도 그렇고(작중에서 나오진 않지만, 그녀가 기숙학교로 들어간 뒤 일주일 후 집을 나갔다고 한다.). 이런 인물들 반대편엔 경선의 어머니가 있다. 그러고보니 여기서도 남성성의 부재가 나타난다.

감독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20년에 한국에서 드디어 낙태죄가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라고 했다. 한국은 이런 담론에서 (거의 늘) 유럽보다 뒤쳐진다. 하지만, 그런 나라에서 이런 주제로 베를린날레에 영화가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베를린에서 돌아오고 오늘(2월 25일) 나는 다시 연구실로 출근했다. 옆자리 친구와 베를린 다녀온 얘기를 하다가 독일이 아직 낙태죄가 있다는 것을 듣고 놀랐다. AI로 간단히 찾아보니, 12주 이내에 의료인이 시행하면 처벌이 면제된다고 했다. 한국도 현재 법은 모자모건법상 원칙적으로는 인공임신중절이 금지되지만, 여러 예외 상황(모체건강위협/태아이상/경제적사유)에 허용되고, 24주 이내로 제한된다고 한다. 여러모로 여러가지 생각을 남기게 해준 좋은 영화였다.


여담으로, 오프닝에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 마크가 떠서, 영화가 끝난 후 거기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연락을 해보니, 유재은 감독이 이 영화를 KAFA(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찍은것이라 했다. 독일 현지 반응이 좋다고 하니 친구도 좋아했다.


중간에는 Friedrich Strasse에 있는 Dussmankaufhaus에 가서 쇼핑을 했다. 영화제 굿즈 몇 개와 DVD를 샀다. (여기는 아주 위험한 곳이다. 올때마다 돈을 쓰게된다.) 처음에 DVD를 이것저것 골랐다가 감당히 안될것 같아서 추리고 추려서 5개만(?) 골랐다.

두개는 SF클래식 (터미네이터2 / 에일리언)으로 곧 있을 바이로이트 WG에서의 상영을 위해샀고, 다른 하나는 작년 영화제에서 재밌게 봤던 블루트레일이 DVD로 나와있길래 샀고(작년 심사위원상도 탐), 또 다른 하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시리즈중에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 할 순 없지만, 엔도행성의 분위기와 이웍을 좋아하기 때문에 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페촐트의 가장 최근작 <미러 넘버 3>를 샀다.


https://www.youtube.com/watch?v=nFQEUuodCQ0

<O Último Azul/The Blue Trail> Trailer


DVD섹션에서 만난 한국영화 여배우의 얼굴들도 반가웠다. 다음 영화 시간을 기다리면서는 지하 몰을 천천히 돌기도 했다.




두번째 영화는 베를린 palast 바로 건너편의 Blue Max Theater. 여기서 영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건물 앞에 놓여진, 베를린 곳곳에 있는 곰 동상이 이 버전이 매우 귀여웠다.

입구에서 왼쪽/오른쪽을 고르라길래 나는 당연히 왼쪽으로 갔다.

두번째 영화는 콜롬비아 배경. 영어로는 <젬스톤>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제목처럼 영화 중간중간 매혹적인 색상을 가진 광물들이 쇼트로 나왔다. 사운드 적으로도 좋았다. 영화는 프랑스 농촌에서 일하는 한 콜롬비아 남자로부터 시작되고, 그는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고 (정확히는 한 도시에 있는 성당의 성모 마리아 상에 박힌 에메랄드를 훔쳐오라는!) 그 성당의 담당 신부를 생각보다 간단히(?) 죽이고 돌아온 뒤, 여자친구와 사랑 혹은 미래를 속삭이면서 끝났다. 영화의 서사는 느슨했지만, 뭔가 고전영화의 문법을 사용하여 현재의 스타일을 섞어놓은 재해석본 같았다.


Piedras preciosas / Gemstones - Simón Vélez (Forum)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인터뷰 내용 정리 :


-. 콜롬비아의 이미지가 외부에서는 갱단, 범죄로 여겨지는데 영화 중간중간 보이듯이 나는 좀 더 그 도시의 풍경들을 담아내고 싶었음. 그냥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길거리의 모습을. 새들의 모습들.


-. 범죄이야기를 고른 것은 범죄 스토리가 영화의 캐릭터나 도시 혹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해주는 좋은 장치이기 때문. 에메랄드는 히치콕의 영화에서처럼 영화의 네비게이터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


-. 중간에 춤추는 장면을 넣은 이유? 내가 갑자기 춤추는 걸 좋아한다. 영화의 힘은 자연적이라고 생각. 현실에서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클래식 영화는 어쩌면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 나는 어릴 적 영화 배경이 동네가 되는 카톨릭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가 맘에 안들어서 어린마음에 신부님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인공이 신부님을 죽이는 것으로 설정했다.


-. 영화에 나오는, 부인에게 살해당한 파일럿 배우는 나 였다. (관객들 놀람)


-. 레스토랑 신에서 신부로 변장한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여자는 진짜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원래 나는 살인 전에 주인공이 스프를 먹는 장면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영화에 나오고 싶어해서 등장시키고 캐릭터를 입혔다.


-. 내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사람들이 늘 부활한다. 나의 카톨릭적 배경인걸까?


-. 영화에서 내가 하고 싶은말이 무엇이라는 질문에 다르게 답해본다면, 나는 영화를 질문으로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참고 : 영화 엔딩에서는 파일럿이 부활하고, 그의 머리 위에서 비행기가 날아가며 배경 색이 변한다. ) 남미의 어떤 영화들은 명로하게 떨어지는 결말보다 영화 자체의 재미를 좀 더 (흥과 같이) 느끼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영화제에서 감독들의 답변을 듣고 있자면 남미 쪽 사람들이 정말 재밌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독일이 좋다고 생각해서 독일로 왔지만, 가끔은 내가 그냥 독일의 시스템을 좋아한 것일 뿐, 어떤 나라 사람들을 좋아하냐고 다시 물어본다면 나는 좀 더 감성적/감정적인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스페인, 멕시코, 남미..)


감독 (가운데) / 프로덕션 책임자(오른쪽)


저녁으로는 중국식당에서 요리를 먹었다. 요새 고민이 있었는데, 행운과자에서 좋은 문구가 떠서 기대중.. 잘 풀리겠지.


너는 네 일터에서 곧 가장 좋은 자리를 받을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밤 열시가 되었고, 마지막은 홍상수의 영화였다. 베를린날레에서 지금까지 나와 홍상수감독사이 전적은 0승 3패다. 첫 베를린영화제에서 본 <물안에서>는 나에겐 너무 과하게 느껴졌고, 그 이듬해와 다음해에 내가 안본 영화들은 상을 받았다. (<여행자의 필요> +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그런점에서 이번에 파노라마 섹션에 올라온 <그녀가 돌아온 날>은 과연 어떨지... 란 기대를 하며 극장에 들어갔다. 영화는 흑백으로 진행됐고 내가 좋아하는 송선미배우가 주연이었다. 그녀가 영화 안에서 그녀가 분한 여배우처럼 10년 동안 연기를 쉬었던 건 아니엇지만, 남편과의 사별때문에 살짝 공백기가 있었기도했고, 나역시 송선미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오랜만에 접해서 마치 배우가 자신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 느낌이 내게는 들었다. 이번 영화는 무승부라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지만 엄청 좋지도 않았기 때문에. 난 그의 예전영화들이 더 재밌는 것 같다. 0승 1무 3패.


그녀가 돌아온 날 / The Day She Returns - 홍상수 (Panorama)


여배우는 자신의 컴백 영화때문에 하게된 세 번의 인터뷰 말미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늘 '너 자신을 사랑해라.'라고 강조한다. 나는 진짜 사랑만 하면서 살거에요, 라고 확신와 약간의 화가 섞인 말투로 말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여담으로 영화 안에서 독일 커피/맥주에 대한 극찬이 나오는데 너무 웃겼다. 맥주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커피는 잘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도 많이 웃었다. 맥주도 사실 체코도 맛있고 한국에서도 요새는 크래프트맥주가 맛있는게 워낙 많아서… 극중에서 베를린에 식당을 했던 독일인 셰프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잠깐 나오는데 이번 베를린날에에서는 유독 한국영화 두 편에서 모두 베를린이라는 지명이 언급되서 재밌었음. (<지우러 가는 길>에서는 윤지가 낙태수술을 하려고 간 동물병원이름이 '베를린'이었다.) 이런 지역적 명명은 감독들의 갈망인걸까... 홍상수의 경우엔 그를 짝사랑하는 베를린영화제에 대한 홍상수의 답변인걸까... 맥주는 베를린말고 바이로이트가 맛있다…


숙소로 돌아갈 땐 동물원 역에서 버스로 갈아타서 갔다.

아침 9시에 나와서 돌아온건 밤 12시 반이었다. 샤워하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라 너무 졸려서 기절했다. 2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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