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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Sep 27. 2016

자소설 쓰기

데고바의 연무와 늪지에서

0.

현재의 나는 인생의 그 어느 지점보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명시적으로 보이는 글쓰기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1번, 성장과정에 대해 기술하시오. 2번, 자신의 장/단점을 쓰시오. 묻는 대로 답변을 적으면 된다. 그러나 나는 아주 처음엔, 이 간단한 메커니즘에 적응하지 못했다. 


1. 

자소서과 소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나는 처음에 그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자소설이라는 웃픈 단어가 있지만)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내가 창조해 나가는 것이지만, 자소서는 말 그대로 '나'의 과거 세계를 쓰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거기서 숨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그들의 심리상태와 배경은 꿰뚫고 있으면서 정작 나 자신의 배경은 안갯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이었다. 


2. 

여기 내가 살던 동네가 있다. 지금은 재개발에 들어간 탓에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잠시 그들을 현실로 되찾아 온다. 나는 금호역 4번 출구 앞에 서있다. 내 눈 앞에는 자욱한 안개가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길을 걸어간다. 심지어 눈을 감고도. 마침내 집에 도착한다. 

내가 처음 자소서를 썼을 때 느낀 기분이다. 분명 처음과 끝은 있는데, 중간이 없었다. 글을 자세히 들여보니 그곳엔 형체가 없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것은 '사실'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궁금한 것은 내가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집에 갔는가? 


3.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며 많은 일을 겪는다. '모든 사람의 삶은 소설로서의 가치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공부를 할 때 배웠던 문장이다. 나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혹은 허구의 일생을 보아왔다.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막상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남들처럼, 친구들처럼 중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를 다니며 군대를 갔다 오고, 그러고 나니 지금의 나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좀 더 그 속을 낱낱이 들여다봐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스토리'를 발견한다.


4. 

물론 안다. 내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남과의 비교는 으레 열등감을 낳고, 그 열등감은 자존감이라는 둑을 무너뜨린다. 결국 중요한 건 '나의 길'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아카이브'를 재 정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쉽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바로 한 시간 전의 일도 헷갈리는데 과거의 일은 오죽할까. 나는 늪에 빠진 'X-wing'을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루크'의 심정으로 내 뇌의 '요다'가 즙을 짜내듯이 뉴런들을 비틀어 고문해 과거의 기억들을-미화되고 뒤틀렸을지도 모르는-끄집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5.

그리고 나는 그것을 옮겨 적었다. 부풀려지고, 흠이 난 곳은 다듬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늪지대에서 끌어올린 그 전투기를 타고 무사히 한 제국의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하여 두 번째, 도색작업 및 개조가 시작된다. 대체적으로 제국의 종류와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특징들이 있다. 선두 부분은 열정이 보이는 빨강으로 도색하면 좋고, 날개는 더 빠르게 날아갈 수 있게 보조장치나 혹은 그것을 마련할 길이 없다면 빠르게 보이게 하기 위해 약간의 니스칠을 하면 좋다.  


6.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생각해보니 '자소설'은 그저 우스개 소리가 아니었다. 소설에도 주제와 명확한 플롯이 있는 것처럼, 자소서에도 플롯이 있어야 했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사로잡기 위해 약간의 '조정'을 해야 한다. 같은 이야기도 주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진다. 같은 에피소드에서도 나는 책임감을 가지기도 하며, 숨겨져 있었던 내 장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안된다. 없던 것이 생기는 순간, 그것을 덮기 위해 무한정 많은 또 다른 '조정'이 가미되고 그것은 점차 '조작'으로 변한다. 


7.

대략 열 군대의 자소서를 작성했다. 조금씩 감이 잡히는 것 같다. 마치 첫 소설을 완성했을 때 느꼈던 기분이다. 수많은 글들을 쓰면서 느낀 것은 이렇다. 자소서와 소설은 다르지 않다. 두 쪽 모두 나의 의도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비단 과거의 이야기만 쓰는 것이 아니다. 과거-현재-미래가 들어있는 연속체. 나는 자소서를 쓰며 오랜만에 '자전소설'을 썼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나쁜 버릇도 고치려고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을 위해 ~하겠습니다."라는 피동적 표현을 버리고 직설적으로 나아간다.


8.

첫 번째 'X-wing'의 결과는 금요일 알 수 있다. 부디 첫 번째 관문을 잘 통과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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