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텍사스 고모>를 보고
*연극 <텍사스 고모>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나는 늘 서울역의 앞 쪽만 보았었다. 서울스퀘어와 서울로가 있고, 그 뒤를 고전적 양식과 현대적 양식이 합쳐진 서울 역사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국립극단의 연극을 예매했는데, 극장은 서울역 뒤편에 위치했다. 퇴근 후 천안에서 서울역까지 오는 여정은 같았으나, 오늘만은 달의 뒤편을 보는 것처럼 서울역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자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국립극단 건물은 빨강의 컨테이너가 이어진 형태였고, 밝은 등이 켜져 있어, 마치 야시장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난생처음 가본 그곳에서 연극 <텍사스 고모>를 보았다.
텍사스 고모는 괴산에서 태어났다. 빵집에 갔다가 리차드를 만나고 리차드를 따라 부푼 꿈을 안고 텍사스로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던 일은 옥수수를 꺾고, 목화를 따고 화장실보다 못한 공간에서 매일 잠을 청하며 옥수수 잎에 베인, 시간이 흐를수록 메말라저가는 자신을 고향을 떠나갈 때 친구가 준 고추장과 농장의 멕시코 아줌마들이 준 타바스코를 양배추에 찍어 먹는 일이었다.
천천히 머거.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에 지쳐 들어간 빵집. 그곳에서 땅콩 크림빵을 먹던 그녀에게 한국말이 서툰 리차드가 뱉은 말은 순식간에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 말은 그녀를 텍사스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미국에 가면, 그곳에 가면 비키니를 입고 수영장이 딸린 집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괴산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온 것이었는데. 그렇게 30년이 넘는 세월만 흘러버렸다.
한편 그녀의 고향에서 환갑이 다 된 그녀의 오빠는 이혼한 부인을 대신해 키르기스스탄에서 19살 먹은 여자를 데려온다. 중3인 그녀의 딸과는 세 살 차이. 근대에서나 일어났을 법한 상황에 딸은 기겁하며 아버지와 대립하고 여자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한다. 괴산에서는 다른 국적 여자를 둔 남자들이 많아. 왜 나만 가지고 그러니. 아버지의 말이 되돌아온다.
괴산에는 그래서 외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이 산다. 부탄으로 돌아간 엄마를 둔 아이. 집을 나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카자흐스탄 엄마를 둔 아이. 엄마의 고향으로 가고 싶지만 그들은 한국어 하지 밖에 못하는 다문화 가정의 혼혈아들이다. 그래서 텍사스 고모의 조카는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 콘돔을 산다. 아버지의 욕정에서 나온 실수를 막기 위해, 한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도시로 혹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버린 엄마를 평생 그리워하며 힘들어할 아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텍사스 고모도 그랬다. 그녀는 두 달에 한 번 남대문 시장을 들러 중국에서 만든 텍사스 캔디와 호놀룰루 말린 파인애플을 괴산으로 보낸다. 사실 그녀는 의정부에 산다. 그녀가 텍사스의 삶을 언제 그만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지는 모르겠다.
다시는 이 한국 땅에 발을 붙이고 싶지 않았는데, 더 폼 나고 멋진 삶을 따라 미국으로 간 것이었는데 그녀는 미국에서 낳은 아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씩 조카에게 전화를 한다. 고모는 지금 텍사스에 살아. 수영장 딸린 집에 살고 있어. 내가 보내준 텍사스 캔디는 잘 받았니? 파인애플도 먹어보렴. 그리고 그녀는 조카의 입을 통해 오빠가 손자뻘 되는 여자를 집에 들인 것을 알게 되고, 괴산으로 향한다.
<텍사스 고모>는 이렇게 과거에 양공주라는 비하적인 표현으로 불렸던, 혹은 해외로 넘어가 힘든 생활을 했던 이주여성의 삶을 현재(와 과거) 한국의 농촌으로 이주한 중앙아시아 혹은 동남아시아 이주여성의 삶을 묘사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들이 느꼈던 고단함과 한을 풀어냈다.
이주여성들은 정말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피붙이 하나 없는 머나먼 땅까지 왔을까? 연극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의 조국에서 찾을 수 없었던 희망을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딴판이다. 텍사스 고모가 낯선 땅에서 멕시코인들과 옥수수와 목화를 채집했듯이 괴산에서 한 손에는 낫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고추밭 깻잎 밭 배추밭을 전전하며 그토록 고대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에서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백인들을 대우하면서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겐 경멸의 언행과 시선을 보내지 않았는가. 농촌의 줄어드는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사람을 가축처럼 ‘사 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사 오고 나서는 노예처럼 그들을 대하고 무시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의 2세들은? 얼굴이 조금 거멓다고 엄마의 나라가 한국이 아니라고 놀리지 않았는가.
연극에 나왔던 대사처럼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똑같다. 여기에서 사나 저기에서 사나 똑같다. 그렇다면 이런 지긋지긋한 순환의 고리를 깰 수 있을까? 텍사스 고모 ‘춘미’는 오빠가 데려온 어린 여자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봤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리친다. 현실은 냉혹하고 너는 속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이미 늙어버린 자신을 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다. ENDE
사진출처 : 국립극단 홈페이지 공연소개(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6814)